- 집 대청소·가방 정리 등 다양
- 의료용 변기 가져 다니기도
- 실존 느낄수 있는 즐거운 고통
- 좋은 무대위한 또 하나의 노력
연출가와 배우들의 차이가 있다면, 간혹 연출들은 “나는 우리 배우들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배우들은 “나는 우리 연출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묘하다는 생각에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를 화두로 꺼내든 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느 연출가가 명쾌한 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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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극단 동녘이 ‘운악’을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국연극제 대통령상(최우수작품상) 등을 받았다. 긴장감 속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은 다양한 징크스를 갖고 있다. |
“그건 결국 연출이라는 사람들은 배우에게 기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배우들을 보고 멋있다, 매력적이다라고들 한다. 멋있고 매력적인 이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강박을 통과하는지 안다면 조금 민망할 것 같다. 배우들에게 각자 취향(?) 따라 징크스가 있다. 너무 다양해서 이 지면에 다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일단 내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는 공연 기간이 시작되기 전 먼저 목욕을 해야 한다. 대중목욕탕에 가서 구석구석 때를 밀고 몸이 좀 가벼워져야 한다. 그리고 집 대청소를 한다. 공연 기간 내내 청소 따위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떤 배우는 공연 전에 가방 정리를 한다. 자신이 평소 들고 다니던 가방 속 잡동사니 중 쓸모없거나 불필요한 것들은 버리고 먼지나 부스러기를 제거한 뒤 새로 가방 속에 가지런히 정리한다.
드디어 공연 날이 되면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징크스들이 펼쳐진다. 많은 배우가 화장실에 얽힌 징크스를 갖고 있다. 어떨 때는 한둘이 아니라서 경쟁이 붙기도 하는데 그 중에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나는 공연 시작 15분 전에 반드시 작은 볼일을 봐야 안정이 된다. 그래서 어떨 때는 화장실 가기를 미루고 미루다 15분 전이 될 때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 전에 다녀오면 뇌가 또 거짓말을 해서 가고 싶어지기 때문에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언젠가는 30분 전에 다녀왔다가 공연 도중 내내 화장실이 가고 싶다는 생각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 공연은 시작하고 끝이 날 때까지 무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2인극이었다. 한 번의 곤혹스러운 경험 덕에 그 뒤 남은 공연 기간 의료용 변기를 마련하여 여차하면 무대 뒤에서 잠시라도 해결할 준비를 했었다. 그래서 변기를 사용했는지 아닌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작은 것’은 그나마 양반이다. ‘큰 것’이 문제가 되는 배우는 정말 큰 일이다. 공연 전에 반드시 큰 볼일을 봐야 하는 배우의 일이다. 어느 날 공연 전에 거사를 치르지 못한 이 배우는 공연이 시작되고 예기했던 불안이 엄습해왔다. 한 장면이 끝나고 그는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다음 장면에 자신이 등장하기까지 꽤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퇴장한 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졌다. 무대 위 남은 배우 중 중요한 인물이 대사를 까먹은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무대 위 에너지가 술렁이기 시작할 무렵 어떤 배우가 기지를 발휘했다. 직감적으로 대사를 잊은 배우가 제대로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 장면의 큐가 하필 화장실에 간 그 배우의 역할을 호출하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큰 소리로 역할 이름을 부르면 그 역할이 “무슨 일인가?”라는 식의 대사를 하면서 등장해야 한다. 대형사고가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를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장면을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다. 무대 밖 배우들은 화장실로 뛰어가 그를 다급하게 불렀고 그는 이 느닷없는 사태에 거사를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황급히 무대로 뛰어올랐다는 일화는 아직도 가끔 회자하여 큰 웃음 주신다. (이날 사실 관객들은 대사를 잊은 배우가 아니라 느닷없이 불려 나온 배우가 실수한 줄 알았다고 한다.)
강박이나 징크스 따위는 사실 배우에게 실존을 느끼게 하는 즐거운 고통이다. 그러나 배우들이 온전히 무대에 오르기 위해 감당하는 정신적 노동이 하잘것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도 연출이 배우 위의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예술감독이 있다면 ‘결국 연출은 배우에게 기생하는 존재’라는 어느 연출가의 말을 상기해보길 바란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언제든 배우의 자리에 들어가 보길 권한다.
연극인·연극비평지 ‘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