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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벌어진 동족상잔 비극 보고 ‘순수미술’ 도저히 못하겠더라

부산 찾은 88세 김영덕 화백

  • 국제신문
  •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  |  입력 : 2018-06-10 18:57:31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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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에 무산된 미대 진학의 꿈
- 국제신보서 일하며 참상 목격
- 트럭에 실려가는 젊은이의 시체
- 부모 잃고 거리에 내몰린 소년…
- 화단 데뷔작 ‘전장의 아이들’서
- 아이들 모습 통해 전쟁참상 비판
- 적극적 현실참여 최근 재조명

“뻣뻣하게 굳은 젊은이들의 시체가 트럭 적재함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어요. 부모 잃은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았죠. 국민이 파멸적인 상황에 내몰린 장면을 제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전쟁에 순응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지난 5일 부산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 개관 20주년 특별전을 찾은 김영덕 화백이 자신의 화단 데뷔작 ‘전장의 아이들’(1955) 앞에 섰다. 전쟁고아들이 전쟁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작품이다. 순수미술을 지향하던 당시 화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지난 5일 부산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부산 근현대미술 태동기를 살펴보는 시립미술관 개관 20주년 특별전 2부 ‘피란수도 부산_절망 속에 핀 꽃’의 주요 출품작 ‘전장의 아이들’(1955)의 작가, 김영덕(88) 화백이 방문한 것이다. 경기도 고양에 거주하는 작가는 부산 미술계의 두 번째 서양화 동인 ‘청맥’(靑脈)에서 함께 활동한 고 추연근 화백의 회고전(국제신문 지난 1일 자 20면 보도)과 시립미술관 20주년 특별전을 보러 부산을 찾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2년 뒤 제작해 이듬해 1956년 3월 청맥 동인 창립전에 선보인 그의 화단 데뷔작 ‘전장의 아이들’은 여러모로 특별한 작품이다. 끔찍한 동존상잔의 아픔을 겪었지만, 국내 화단에서 이를 사실적 또는 비판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 시립미술관 20주년 전에 나온 작품들도 고된 피란생활이나 돌아가고픈 향수를 드러난 작품이 많다. 종군화는 사실화이긴 하나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기 어렵고 선전화라는 한계가 있다. 반면 ‘전장의 아이들’은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형상화했다. 9명의 아이는 등을 맞댄 채 둥글게 서서 손을 잡고 무엇인가 경계하고 있다. 어른이 사라진 공간에서 서로를 지키는 아이들의 결연한 의지, 향토적 색감이 돋보인다.

김 화백은 이 작품에 대해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곳곳에 급조된 비포장 신작로의 흙바닥에 서서 전쟁 반대를 시위하는 남루한 전쟁고아를 그렸다. 그림 속 소녀는 당시 전투지역에서 사람만 모여 있으면 기총소사를 해대던 쌕쌕이(제트비행)를 경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전쟁반대 시위’를 하지는 않았다.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김 화백 눈에는 마치 전쟁반대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이들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전쟁이 확대되는 걸 막고 빨리 휴전을 해야 하는데 정부는 북진통일을 한다고 야단이 났다. 애초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고, 권력자들이 정치력을 발휘해 빨리 끝냈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국민을 파멸적인 전쟁으로 몰았다. 이를 알고도 ‘순수미술’만 할 수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60년 전 남다른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데는 5년간의 신문사 기자 생활이 배경이 됐다. 충남 아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자란 김 화백은 고교를 마친 뒤 일본의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밀항하러 1950년 4월 부산에 왔다. 안타깝게도 두어 달 뒤 한국전쟁이 터져 계획은 좌초됐다. 대신 전쟁으로 기자를 급하게 구하던 국제신보(국제신문의 전신)에 입사했다. 부산시청을 출입할 때였다. 부산시가 주로 부산 장정으로 이뤄진 3사단 23연대를 격려하려 위문단을 파견해 이를 따라 그도 포항에 간 일이 있었다.

전쟁을 눈앞에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젊은이들 시체를 적재함에 실어 어디론가 가는 트럭, 좌익으로 몰린 청년의 손목을 철삿줄로 감아 즉결처분하는 경찰을 봤어요. 소름이 돋고 전쟁을 증오했어요. 동족상잔의 우매함에 통곡했습니다.” 이 경험은 1960년대 이후 ‘인탁(인간탁본의 줄임말)’ 시리즈의 바탕이 됐다. ‘인탁’은 암울한 한국 정치 상황에서 박제돼 탁본처럼 만들어진 인간의 시신을 암시한다.

국제신보에 있다 보니 세계 미술계 소식을 신속하고 풍부하게 접할 수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해 일본 신문에 소개된 세계 화단의 동향과 신간 미술 책 정보, 일본의 미술잡지·단행본을 접할 수 있었다. 일본 신문에 소개된 신간을 부산 서적상에 주문하면 세계 어디의 책이든 2주 만에 도착했다. 한국이 세계 화단과 단절됐던 때 그는 특별한 환경에 있었다. 일본 신문에서 본 프랑스의 L’homme Temoin(옴므 떼모앙) 즉 ‘증언하는 자’, 의역하면 ‘시대의 증인’ 그룹의 강력한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창립 선언문은 ‘전장의 아이들’ 제작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김 화백은 1961년 서울로 가 작업을 계속하며 생계를 위해 최인호 작가 ‘별들의 고향’, 박경리 작가 ‘토지’의 신문 연재 삽화를 그렸다. 시대를 비판적으로 기록한 보기 드문 작품을 그렸지만, 화단 중심부에서는 조금씩 멀어졌다. 다행히 올해 미술전문 잡지 ‘미술세계’에서 회고전을 여는 등 재조명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는 화가 김경 정규제, 미술평론가 이시우, 시인 장호 조향,영화평론가 여수중, 피아니스트 김재석 등과 함께한 옛 사진을 보여주며 “부산 문화계 대선배들은 뜨내기에 불과했던 어린 내가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존중하고 사랑해줬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참 행복한 20대를 보냈다”고 진한 그리움을 전했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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