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고 보조금 통합관리시스템
- 예술인 의견 전혀 반영 안돼
- 자율성 보장 대신 통제 기능만
- 세금 거액 들여도 만족도 낮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감독 켄 로치) 첫 장면은 어둠 속에서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와 여자의 대화가 전개된다. 남자 목소리는 점점 답답해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여자의 소리는 같은 톤,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사무적이다 못해 기계적이다. 화면이 열렸을 때 카메라는 줄곧 남자 쪽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면접임을 알게 해준다. 남자는 주인공 다니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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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영화감독 켄 로치가 연출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한 장면. |
다니엘은 성실하게 살아온 늙은 목수다. 심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국가보조금인 질병 수당을 지급받기 위해 자격여부심사를 받는다. 첫 장면에서 다니엘에게 쏟아지는 질문은 그의 질병과 무관하다. 매뉴얼에 따른 비현실적 질문들에 다니엘은 내내 답답해한다. 결국 우편으로 ‘부적격’을 통보받은 그가 다시 기관을 찾아 재심을 요구하자 인터넷 접수만 가능하단다. 이후 구직활동을 전전하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인터넷을 쓰고자 고전을 거듭하지만 다니엘의 문제와 어려움은 해결될 기미 없이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그를 좌절하게 한다, 인터넷으로 전자접수를 해야만 하는 시스템과 규정과 절차를 내세워 외면하는 관료적 공무원들의 태도에 분노한 다니엘은 지급기관의 벽면에 자기 이름과 요구를 적어 저항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결국 ‘인간’ 없는 시스템의 불통 아래 끝내 수용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의 초상을 보여준다.
지난 5월 24일 기획재정부와 부산시 주최로 부산문화재단에서 e나라도움시스템활용 교육이 실시됐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e나라도움(국고보조금 통합관리시스템)’은 국고보조금의 예산 편성부터 정산까지 보조금업무의 모든 과정을 처리하는 시스템으로 2014년 박근혜 정부 때 기재부가 정부 국고보조금 사업을 관리하기 위해 구축을 결정,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전에는 국가문화예술지원시스템(NCAS)를 사용했고 지금도 이를 일부 사용하도록 돼 있다.
이날 교육에 참여한 사람에는 보조금을 받는 예술인뿐만 아니라 보조금 지급 업무를 맡은 관련 기관 직원들도 있었다. 교육이 시작하기 전 너나없이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 전문가들임에도 이전 시스템에 비교해 어렵고 번거로우며 이로 인해 보조사업자들로부터 밀려드는 민원을 해결하느라 정상적인 업무가 어려울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문제점을 절실히 느끼는 건 문화예술 관련 공무원도 마찬가지라 한다. 전문가조차 혀를 내두르는 e나라도움이 운영된 이후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시스템의 불합리함을 줄곧 호소하며 정부에 건의해 왔다. 국민청원을 비롯해 설문조사, 간담회 등 다각적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7 e나라도움 기능 개선에 따른 문화예술계 사용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2.9%가 불만족을 나타냈고, 43.7%가 기존 보조금 교부 시스템 NCAS시스템보다 e나라도움시스템이 더 불편하다고 응답했으며, 15.4%는 문화예술계를 감시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등 부정적 반응이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 57.5%가 사용에 어려움을 느껴 사업 포기를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시스템을 사용하다 보면 도대체 이렇게 어렵고 불편한 시스템을 왜 거액의 세금을 들여 만들었는지 의아하다. 그러니 “은행업무사이트보다 못하다” “만든 사람만 편리하다” 는 말이 쏟아진다.
지난 1월 11일 국회 정론관에서는 ‘적폐청산과 문화민주주의를 위한 문화예술대책위원회’와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가 ‘e나라도움’ 사용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이 주장한 “시스템을 도입할 때 이 시스템을 써야 할 문화예술인의 의견은 전혀 묻지 않고 ‘앞으로 이 시스템을 쓸 테면 정부 돈 받고 못 쓰겠으면 지원사업 하지 마라’는 식으로 진행했다”라는 의견에 동감한다. 또한 “행정시스템을 전산화하려면 사용자 관점에서, 사용자 편의를 고려하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e나라도움은 관리, 통제 관점에서 만들어졌기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는 의견에 정부는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한다. e나라도움시스템 활용 교육을 듣는 내내 영화 ‘나 , 다니엘 블레이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관련 부처 ‘높으신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연극인·연극비평지 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