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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사라진 청년세대 리얼리티

버닝(2018)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5-31 18:41:16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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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버닝’(2018)은 각기 위상을 달리하는 3명의 인물, 3개의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택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종수(유아인), 나레이터 모델로 일하는 종수의 어릴 적 친구 해미(전종서), 해미가 여행길에 만난 벤(스티븐 연)은 각자 사는 공간에 의해 구분된다. 수도권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가까워질수록 빛은 밝아진다. 파주 변두리에 자리한 종수의 집은 시종일관 볕이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음지로, 해미의 원룸은 서울 시가지 안이지만 노을 질 무렵이 되어서야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을 겨우 받을 수 있는 구석으로 묘사된다. 반면 벤의 집은 항상 풍성한 조명의 화사함으로 휩싸여 있다.
이창동 감독 ‘버닝’의 한 장면. 현실성을 담보하지 않은, 도식적인 계급론의 문학적 관념이 지배한다.
공간에 비치는 빛의 세기는 인물 간 사회적 계층의 격차를 은유한다. 해미는 벤의 애인이 되어 상류층에 편입하려 하고, 종수는 그런 해미를 보며 박탈감을, 벤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느낀다. 해미의 집에서 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수음을 하는 종수의 모습은 남산타워로 표상되는 ‘도시적 삶의 정상성’에 진입하지 못한 자의 결핍을 은유한다. 빛을 갖지 못한 자와 가진 자의 대비는 곧 무산(無産) 계급과 부르주아(bourgeois)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이어진다. 매번 애인을 갈아치우고 자신이 주최하는 모임의 노리개로 삼는 벤은 노동 계급을 도구 취급하는 자본가적 인물의 변주로 보인다. 포르셰와 낡은 트럭의 적나라한 대비처럼 ‘버닝’의 근간에 깔린 건 낡디 낡은 계급투쟁의 도식이다.

베트남전을 경험하고 중동 건설현장에 다녀왔다는 종수의 아버지는 은연중에 ‘박하사탕’(1999)의 영호를 상기시킨다. ‘버닝’은 ‘초록 물고기’(1997)에 이어 다시 청춘 군상을 다루는 영화인 동시에, ‘박하사탕’의 아버지 세대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이후 삶의 전선으로 내몰린 자식 세대의 현재를 다루고자 한 예술적 야심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닝’의 인물들에 이르면 ‘초록물고기’의 막동이가 지녔던 현실적 절박함과 욕망의 구체성, ‘박하사탕’에서 근현대사의 질곡을 한 몸에 품고 한 세대를 대변했던 종수의 역사적 보편성은 사라지고 없다. 종수와 해미, 벤은 단지 빈부 격차에 따른 계급적 도식을 드러내기 위한 표상으로서만 기능할 뿐, 평범한 청년 세대의 처지를 대변하는 인물로 바라보는 데 필요한 리얼리티는 심각하게 빠져 있다. 이는 올리버 스톤이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2010)에서 게코의 딸과 사위 세대를 피상적으로 묘사하면서 ‘월스트리트’(1987)의 미덕을 상실했던 바를 연상시킨다.
‘초록 물고기’와 ‘박하사탕’이 현실과 역사에서 길어 올린 리얼리티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면, ‘버닝’은 정해진 논리적 도식 안에 현실의 풍경을 구겨 넣음으로써 도리어 당대에 대한 리얼리티를 상실하는 아이러니에 처하고 만다.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현실적 구상(構想)의 세계를 떠나 점차 문학적 추상(抽象)의 단계로 온전히 넘어간 ‘밀양’(2007)과 ‘시’(2010)와 비교하더라도 ‘버닝’에는 이전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통념의 허를 찌르는 윤리적 통찰의 조각을 찾아볼 수 없다. 남는 건 오로지 도식적인, 너무나 도식적인 계급론의 문학적 관념성일 따름이다. 현실성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정치적 메타포는 반드시 실패한다. 은유적 화법을 취할수록 실재성이 중요하다는 예술적 역설을 잊으면서 ‘버닝’은 이창동 필모그래피의 작은 실패로 남게 되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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