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경주·해양 실크로드 잇는
- 핵심 바닷길이었던 ‘영남해로’
- 영남 앞바다의 포구·어촌 사이
- 물자 오가던 해양문화 대동맥
- 중국·일본 등 외국 정보도 유통
- 명나라 바닷길 폐쇄 정책과
- 육지중심 세계관 성리학 탓에
- 조선 시대 접어들며 점점 쇠퇴
- 해방 후 수출 위주 무역국가돼
- 드넓은 세계 무대로 크게 확대
영남이라는 말은 고려 시대부터 쓰였다. 영남해로라는 말 역시 그때부터 생겨났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갑자기 영남해로 자체가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 쓰이던 바닷길이 새삼스레 영남해로라 불렸을 뿐이다.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은 농경기술을 개발하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영남해안에도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 그런 마을들이 곧 태초의 영남 어촌이었고 그곳 사람들이 곧 태초의 영남 어민이었다. 태초의 영남 어촌에 살던 태초의 영남 어민들이 쓰던 태초의 바닷길이 곧 태초의 영남해로였다. 영남해안가에 즐비하게 분포한 신석기시대 유물·유적은 태초의 영남해로를 알려주는 명확한 증거다.
어민에게 바다는 농민에게 논밭과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터전이다. 농민이 논밭을 일구고 가꾸기 위해 드나드는 길은 논길, 밭길이 된다. 어민이 바다 어장으로 드나드는 길은 바닷길이 된다. 어민에게 바닷길은 생명길이나 같다. 바닷길은 섬사람과 섬사람 또는 섬사람과 육지 사람을 잇는 교통의 길이기도 하다. 그 교통의 길은 어촌과 어촌, 농촌과 어촌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외부세계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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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제작된 ‘영호남연해형편도’(국립중앙도서관 소장·왼쪽)에는 남해안 현황이 잘 나타나 있다. 오른쪽 지도는 1903년 일본제국육해측량부가 만든 ‘일로청한명세신도’로 경상도 바닷길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
■ 집과 길, 역사·문화의 핵심 요인
예부터 수많은 선각자가 사람과 길의 관계를 깊이 통찰하고 명언을 남겼다.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자 신경준 또한 그런 선각자였다. 그는 ‘도로고(道路考)’에서 “무릇 사람에게는 멈춤과 움직임이 있다. 사람은 멈추면 집에서 머물고, 움직이면 길에서 다닌다. 그러므로 맹자는 인(仁)은 안택(安宅)이요, 의(義)는 정로(正路)라고 하였다. 택(宅)과 로(路)를 인(仁)과 의(義)와 마찬가지로 함께 거론하였으니 로(路)의 중요성이 가히 택(宅)과 동등하다 할 수 있다”라고 갈파했다. 진실로 사람의 역사와 문화는 집과 길을 중심으로 형성·발전되었다. 사람은 집에 머물면서 고립적·정착적 문화를 형성·발전시켰다. 반면 길을 다니면서 유동적·유목적 문화를 형성·발전시켰다. 따라서 사람의 역사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면 집만 볼 것이 아니라 길도 보아야 한다.
집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집 가운데서도 편안한 집은 안택, 길 가운데서도 올바른 길은 정로이다. 편히 살고 안전하게 가려면 안택과 정로를 골라야 하듯, 사람이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인과 의를 골라 행해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갈파이다. 길이 유동적·유목적 문화를 형성·발전시키는 이유는 길을 통해 사람과 물자와 정보가 유통되기 때문이다. 그런 길을 통해, 고립적으로 정착해 있던 사람들은 연결·통합된다. 정보통신기술이 미약했던 전통시대에는 길이 정보통신망 역할까지 했다. 그래서 길이 발달하면 유동적·유목적 문화가 발달한다. 그 결과 민생이 번성하고 국가가 태평해지면 길이 올바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길은 의로운 길 즉 정로(正路)이다. 반면 민생이 몰락하고 국가가 위험해지면 길이 잘못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길은 흉악한 길 즉 사로(邪路)이다.
■ 영남 해양문화의 대동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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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남해를 누볐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 국제신문 DB |
전통시대 길에는 육로와 해로가 있었다. 농업문화가 육로, 토지, 농촌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면 해양문화는 수로로서 해로, 포구, 어촌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해로, 포구, 어촌 주변에는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군시설이 들어섰다. 그렇게 발달한 수군시설과 어촌의 바닷사람들이 거친 바다와 싸워가며 일구어낸 삶의 문화가 곧 오늘날 영남 어촌문화이자 해양문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영남해로는 작게는 영남 지역 해양문화의 대동맥, 크게는 우리나라 해양문화의 대동맥이다. 영남 앞바다에 미로처럼 형성된 영남해로에는 주변 어촌과 포구에서 끊임없이 사람과 물자, 정보가 유입됐다. 바다 건너 일본, 유구, 중국에서 그리고 경상도 낙동강과 태화강 등 내륙 하천에서도 흘러들었다. 유입된 사람·물자·정보는 다시 영남해로를 통해 주변 어촌, 포구, 경상도 내륙 그리고 수도 한양과 바다 건너 외국까지 유통됐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한반도와 만주는 물론 일본열도, 중국 대륙, 저 멀리 동남아와 아랍 세계까지 우리 민족의 활동영역이었다. 그 광대한 영역을 우리 조상은 땅길 또는 바닷길로 누비고 다녔다. 이른바 육상 실크로드와 해양 실크로드가 그것이다. 당시 경주는 해양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였고, 영남 해로는 경주와 해양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핵심 바닷길이었다. 한반도 바닷길과 동북아 해양 실크로드를 연결하던 중심 바닷길이 영남해로였다.
■ 조선 시대 영남해로 위축된 이유
세계를 향해 뻗어있던 영남해로는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이었다. 혹심한 왜구를 겪은 명나라는 바닷길을 폐쇄했다. 공인된 몇몇 사람과 배만 폐쇄된 바닷길을 쓸 수 있었다. 해금과 더불어 세계로 뻗어있던 해양 실크로드도 폐쇄됐고, 영남해로도 더불어 쇠퇴했다.
조선의 주자성리학 역시 영남해로를 쇠퇴시킨 주범이다. 주자성리학은 철저하게 육지 중심 세계관이었다. ‘예기’에 “땅이 만물을 싣고 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지구상 모든 존재가 땅의 부속물이라는 세계관 즉 육지 중심 세계관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바다 역시 땅의 부속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종교 또는 사상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적 세계관에도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무엇보다도 땅의 장점을 최대화한다는 점이었다. 과거 1000년간 누적된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면서 농업국가를 지향한 조선에서 땅의 장점을 최대화하려는 성리학이 만개한 것은 일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조선이 완벽한 내륙 국가였다면 성리학의 장점이 최고도로 발현됐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반도 국가였다. 육지뿐 아니라 삼면에 바다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육지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만연해 바다는 점점 도외시됐고 바닷길 역시 도외시됐다.
그런 추세는 조선 후기 들어 더욱 강화됐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동북아 패권을 장악한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만주를 자신들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封禁) 지대로 설정하고 출입을 엄금했다. 조선 사람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가는 월강(越江)도 엄격히 통제됐다. 월강하다 적발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월강이 엄금되면서 바닷길도 엄금됐다. 해안에서 10리의 바다 안에서만 어업과 수군 활동이 보장되고 그 밖으로 넘어가는 것은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조선 후기 영남해로도 해안에서 10리 이내로 위축됐다.
■ 대한민국 미래를 크게 여는 길은?
위축된 바닷길은 근대 시기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면서 크게 확대됐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확대된 바닷길은 민생을 파탄시키고 국가를 위험하게 만든 흉악한 길이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무역국가로 탈바꿈했다. 영남해로 역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아직 뚫리지 않은 바닷길이 있다. 북한으로 가는 바닷길이다. 그 길이 올바르게 열리는 날, 영남해로도 크게 열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도 크게 열릴 것이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