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권 거치며 서구 향한 동경심에
- 따라야할 사회 체계로 널리 인식
- 미국·영국·일본 등 평판 좋지만
- 저마다 심각한 문제 갖고 있어
- 사회학적 탐구 통해 재구성해야
사회학자 김종태(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 연구교수) 박사가 펴낸 선진국의 탄생은 날카로운 발상에서 탄생했다. 아니, 많은 사람이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엄정한 태도로 달려들 생각까지는 못하던 주제를 학술적 차원으로 끌어들여 정치한 학술서로 써냈다는 편이 실질에 더욱 다가가는 표현이겠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가 서구에 품은 막연한 동경심에서 비롯된 정체성 결핍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 그리고 이런 정체성이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사회학적 탐구”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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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몰려온 피란민들. 이 같은 상황을 겪은 한국에서는 전형적인 선진국 담론이 자라났다. 국제신문 DB |
TV 토론부터 신문 칼럼, 교수의 사회비평부터 전철에 탄 외로운 노인이 젊은 승객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일장훈시에 이르기까지 단골로 나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선진국에서는…”이다. 대체로 “선진국에서는 이러지 않는데 한국은 왜 아직도 이러고 있나. 그러므로 한국은 아직 멀었거나 썩었다”는 논지를 펼치기 위한 도입부로 활용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선진국’이란 분명한 실체가 있으며 우리가 따라가고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와 같은 담론에서 나오는 선진국의 개념은 모호하고 실체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미국은 부자 나라이지만 국민의 다수가 의료 혜택을 제대로 못 받고, 교문을 박차고 들어온 무장 괴한이 교실에 들이닥쳐 수업 중인 학생과 교사 수십 명을 순식간에 총으로 쏴 버리는 사건이 심심찮게 터지는 나라다. 그렇다면 핀란드는? 일본은? 영국은? 이들 나라가 선진적 사회 구조와 의식을 갖춘 평판 좋은 나라임은 맞지만, 그들 각자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구체적 실체이며 각각 살펴야 할 대상이다.
김종태 박사가 10년 가까운 연구와 집필 끝에 내놓은 ‘선진국의 탄생’은 그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쓴 사회학 박사 학위 논문을 인문교양서로 다듬어 펴낸 책이다. 총체적이고 엄정한 학술 작업에 바탕을 뒀다는 뜻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선진국 담론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 체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선진국은 과연 무엇인가?…한국 사회에서 선진국은 어떤 역할을 할까? 현재 우리는 선진국인가, 아닌가?” “한국 사회에서 선진국 개념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대중적인 개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선진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는 아직 없으며, 지칭 대상도 화자의 의도나 자의적 해석에 크게 의존한다.”
저자는 구한말·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때까지의 ‘선진국 담론’ 또는 ‘선진국 용법’을 추적·분석한다. 이어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선진국 따라잡기가 국가적 목표로 설정되는 지배적 담론 시기가 오고, 전두환 정권은 이 담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김영삼 정부에 와서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면서 선진국 개념이 추상화되고 긍정적인 표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커지는 변화가 왔다고 논증한다.
책의 결론에서 “선진국 담론에서 이상화한 선진국은 발전주의자들이 제시한 발전의 표상일 뿐 현실에서 도달 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등 세 가지 근거를 들며 현재 한국의 선진국 담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대목은 매우 인상 깊다.
조봉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