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제주도, 3·1절 기념식에 미 군정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했다. ‘제주4·3’의 서막이었다. 이듬해 제주도민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여 4월 3일 전면 봉기했다. 그리고 무려 3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랜 기간 ‘제주4·3’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단어였다. 4·3특별법 제정,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정부가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 4월 3일을 국가 지정 추념일로 지정 그리고 70주년을 맞아 제주4·3은 이제 대한민국 역사가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천도교의 ‘남북분단 저지 운동’ 역시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지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간략히 소개한다.
 |
| 지난 3일 오후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에서 남북 예술단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
해방 이후 남북한 모두 별개의 단독정부 수립을 서둘렀고 분단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어갈 때도 민족의 간절한 희망은 여전히 ‘남북통일 정부 수립’이었다.
당시 북한 천도교의 교세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47년 6월 약 169만 명이었고 1950년 3월에는 약 288만 명으로 당시 전체 북한 인구의 1/3에 육박할 정도였다.
남북 천도교 지도자들은 “북은 북대로 공산정권을 세우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남은 남대로 단정 수립을 서두를 수도 없다”며 ‘남북통일 정권의 수립’을 촉구하고 나섰다. 남과 북 천도교인이 하나가 되어 1948년 3월 1일을 기해 남과 북에서 미소 양군의 점령 아래 각기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민족의 영구분열을 저지하고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운동을 벌인다.
불행하게도 북한에서는 사전에 발각되어 1948년 2월 24일부터 천도교 간부 약 1만7000여 명이 검거되고 3·1절 기념행사가 전면 금지된다. 그중 87명이 처형된다. 이런 탄압에도 황해도 신계와 평북 영변에서 대대적 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에서는 이 사건을 3·1재현운동이라 부른다.
3·1재현운동 당시 검거를 피한 천도교인들은 영우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준비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북한 당국에 탐지되어 1950년 4월부터 본격적인 검거선풍이 시작되어 영우회의 주모자 165명이 평양감옥에 갇히고,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해 대부분 몰살당했다.
또한 남한 천도교인들도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반대했다.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대한민국)가 수립된 후 “북로당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지령을 받아 천도교 내에서 남조선 천도교의 중심세력을 분리시키고 북한 청우당 세력을 부식시키며 파괴·암살을 위한 지하당원”이란 죄목으로 천도교청우당원들이 검거되고 이듬해 천도교청우당은 정리·해체된다.
천도교는 그 무렵 남에서도 북에서도 발붙이기 힘들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반대! 북한만의 단독정부수립 반대! 북에서는 ‘반동’, 남에서는 ‘빨갱이’. 해방공간의 동학, 천도교가 겪은 수난과 아픔의 역사는 외세와의 끊임없는 민족적 저항의 역사로 제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 이들은 이제 우리에게 상호존중, 화해, 협력, 평화의 소중함을 호소한다. 전쟁의 위협이 가득하던 이 땅 한반도에, 봄과 함께 평화의 봄도 기지개를 펴고 있다.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