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의 단순성을 예찬하는 목소리는 늘 있었다. 2년 동안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얻은 사색을 기록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962)의 ‘월든’이나 스콧 니어링(1883~1983)의 ‘조화로운 삶’과 같이 현대 문명의 부박함을 피해 숲으로, 시골로 들어온 은자(隱者)들의 ‘생활담’은 근대사회의 도시 시스템이 성립된 이래,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았다. 단순함과 느림을 추구하는 자연 회귀의 삶에 대한 동경과 환상은 도시적 일상이 가하는 피로와 속도, 경쟁과 스트레스에 짓눌린 현대의 소시민에게 한줄기 위안이자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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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속 삶을 그린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2018) 또한 이와 같은 자연 회귀의 정서를 벗어나지 않는다. 동명 원작에서 도호쿠의 작은 농촌으로 귀향해 자급자족하는 이치코의 이야기는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을 견디다 못해 귀농한 혜원과 고향에 남은 친구들의 전원생활 이야기로 국적을 옮겨 이식된다. 이 영화가 얻고 있는 반향은 오늘날 도시화된 한국사회에서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삶과는 거리가 먼 피폐한 환경임을 반증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자연회귀 정서, 농촌에 대한 향수는 도시 소시민의 일상이 처한 병폐와 비인간성을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틀 포레스트’가 전하려는 치유의 메시지는 사뭇 비판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먼저 혜원이 만든 음식을 일일이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영화의 이미지즘은 (연출가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음식의 비주얼만 극도로 강조해 식욕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일컫는 ‘푸드 포르노’(Food Porno)처럼 받아들여진다. 작물 재배의 지난한 과정, 시골의 폐쇄적 공동체 문화 탓에 정착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귀농의 어두운 현실은 정성 들인 음식의 빛깔과 차짐을 강조하려는 클로즈업 때문에 그리고 실재보다 강력한 이미지(simulacre)에 의해 뭉개지고, 낭만적인 농촌의 인상만 쉽게 소비될 팬시상품으로 남는다. 더 큰 문제는 영화와는 달리 절대다수의 사람에게는 도시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 기회가 열려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연 속에서 조용하고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두었거나 안정된 수입이 들어올 직업 기반을 다진 사람들일 뿐이다. ‘월든’의 소로우는 명망가 출신이고, 니어링 부부에게는 학계의 경력과 명망 덕에 고정된 인세와 강연 수입이 있었으며, 현실에서도 그러한 삶을 누리는 건 CEO나 엘리트 인력이다. 돌아갈 자연의 터전은 넉넉히 남아 있지 않고 대다수 도시의 서민은 생계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해고되지 않기 위해 도시의 끈을 쉽사리 끊어낼 수 없다. 극 중 혜원의 생활과는 달리, 자연과 동화된 삶의 이면에 남겨진 실상은 계급 불평등의 차가운 현실일 따름이다.
환경(Eco)의 그리스어 어원인 오이코스(oikos)는 본래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총체를 일컫는 말이었다. 소수에게만 열린 자연으로의 도피, 찰나에 그칠 피안(彼岸)과 복고(復古)의 환상보다 중요한 건 콘크리트 도시에 처한 다수의 부박한 삶을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환경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유의 전환이 아닐까? ‘리틀 포레스트’의 메시지에 쉬이 동감할 수 없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