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사랑 이야기에 앞서, 낯선 타자를 대하는 상반된 두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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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이프 오브 워터’는 작고 약한 존재의 사랑과 연대를 보여준다. |
우주연구소의 청소부로 일하는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우연히 연구 소재로 잡혀 온 괴생물체 양서류 인간을 만나게 된다. 실험대상이라기보다는 범죄자처럼 고문당하는 그에게서 연민을 느끼고 교감하는 엘라이자의 반대편에는 양서류 인간을 야만적인 괴물로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보안담당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새넌)가 배치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양서류 인간이 해부될 날짜는 다가오고 일라이자와 동료들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작은 작전’에 돌입한다.
1963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영화의 주제의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이 격화한 냉전기. 적대 진영의 동조자가 내부에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과 공포가 만연한 한편, 주류의 가치관에서 벗어난 타자들은 정상적 삶의 주변부로 내몰려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됐다. 장애인 여성과 흑인 동료, 동성애자 화가와 양국 사이에서 경계인으로서 고뇌에 빠진 과학자 등 다양한 층위를 아우르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역들은 모두 시대의 소수자들이다.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1954)’를 오마주한 양서류 인간 또한 냉전 시기 양산된 ‘B 무비’의 괴물들이 소련의 침략에 대한 상상적 공포를 반영한 산물이었다는 비평적 관점을 상기시킨다.
반면 악역으로서 스트릭랜드는 백인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보수주의 등 당대 백인 남성의 가치를 대변하는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항상 상관 또는 아버지라는 수직적 위계의 정점에서 일방적으로 명령을 강제하고 타인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지배욕에 차 있으며, 타자에게서 오로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위협성밖에 보지 못한다. 잘려나간 손가락으로 은유 되는 남근 중심주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단일한 기준에서 오직 타자를 통제와 착취의 기준으로서만 바라보는 근대적 인간-남성의 오만함. 신-아버지의 이름으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분류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그의 오이디푸스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곧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귀결된다.
영화는 엘라이자와 주변 인물들이 양서류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괴물(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편견에 찬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삶은 달걀과 음악을 건네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친화적인 태도 앞에서 인간과 괴물, 피아(彼我)를 나누던 적대의 경계선은 허물어지고 낯선 괴물 또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유익한 이웃이자 연인이 될 수 있다. 정상적인 인간-남성을 자부하던 스트릭랜드는 타자를 적대함으로 인해 비(非) 인간이 되고, 비 인간으로 칭해지던 괴물과 소수자들은 사랑과 연대를 통해서 ‘인간 되기(be-human)’를 실천하는 이 통렬한 역설이야말로 ‘셰이프 오브 워터’의 핵심이다.
수조의 유리창을 거울처럼 마주하고 만났던 엘라이자와 양서류 인간 둘은 물속에서, 무중력의 공간에서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렇다. 물(water)에는 형태(shape)가 없듯, 사랑과 연대에 어떠한 벽과 경계도 있을 수 없다. 혐오와 배제의 기운이 만연한 오늘날, ‘셰이프 오브 워터’가 던지는 작지만 아름다운 희망의 화두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