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 유럽 예술계 큰 주목 불구
- 국내선 공안사건 연루 고초도

- 26일까지 해운대 신세계갤러리
- 문자추상·군상 등 총 20점 전시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고도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며 회귀를 멈추지 않은 디아스포라,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주목한 국제적인 작가 고 이응노(1904-1989)의 대표작을 보는 드문 기회가 마련됐다.

	수많은 사람을 수묵으로 표현한 ‘군상’. 신세계갤러리 제공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갤러리(신세계백화점 6층)에서 오는 26일까지 ‘고암 이응노’ 전이 열린다. 문자 추상, 군상 시리즈 등 회화, 꼴라주, 오브제 등 대표작품 20점을 선보인다. 다수는 이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이응노는 한국 미술의 대표적인 추상 1세대 작가다. 전통 수묵채색 서화를 탐구해 일가를 이룬 그는 답습에서 벗어나 내면의 들끓는 충동과 예술적 만행(萬行)을 마음껏 펼치고자 1958년 중년 나이에 프랑스로 갔다.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유행하던 사조를 보며 자유로운 조형정신에 자극받은 그는 동서양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자 추상’ ‘군상’ 등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그는 1964년 프랑스 파리 세르뉘시미술관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3000여 명 후학에게 서예와 한국화의 기본과 정신을 전파하기도 했다.

	고암 이응노의 ‘문자 추상’ 작품.

유럽 미술계는 동양적 주체성이 뚜렷하면서도 전후 현대미술의 맥락을 담은 이응노의 작업에 주목했기에 당시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세계 각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응노가 작고한 지 28년이 지난 지난해에도 프랑스 대표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와 세르뉘시미술관이 연속해서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그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1967년부터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아픔을 겪었다. 이 사건으로 한동안 국내에서 이응노를 언급하는 일이 금기시 됐고, 그는 해외에서 오히려 이름이 높은 작가로 남았다. 동백림 사건은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통해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응노가 옥중에서 밥풀과 흙을 뭉쳐 만든 조각품도 볼 수 있다. 그는 생전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한는 것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하여 화장지에 데생을 시작했다.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1960년대, 1970년대 이른바 ‘문자추상’을 그려 유럽과 아시아에 이름을 알리던 그는 80대 노인이 돼 ‘군상’ 시리즈를 시작했다. 하얗고 커다란 종이에 오직 수묵만으로 숱한 사람이 어울려 춤추는(또는 시위하는) 모습을 그렸다. 춤추는 사람은 아시아인인지, 유럽인이지, 아프리카인인지, 도시 사람인지, 시골 사람인지, 여성인지, 남성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노인인지, 청년인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사람이다.

이응노는 생전 인터뷰에서 “수천 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 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다”고 설명했다. 무료. (051)745-1508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