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 해양강국 노린 청나라
- 리홍장이 10여 년간 양성하고
- 야심차게 창설한 함대 북양해군
- 독일제 철갑함 정원호·진원호
- 야간 일본 어뢰정에 격침 당해
- 日 전리품·편입 수모 겪는 등
-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전멸
- 복원한 정원호 박물관으로 변신
- 中,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활용
- 항공모함 건조 등 해양패권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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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일전쟁 때 정원호에 대한 공격을 기록한 일본 쪽 역사화. |
■어뢰에 피습당한 정원호
청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95년 2월 4일 밤의 일이다. 일본 연합함대 소속 ‘제9호’ 어뢰정은 청나라 북양함대사령부가 있던 류궁다오(劉公島) 해역에 잠입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본 어뢰정이 발사한 어뢰는 정체를 알 수 없던 거대한 군함의 선미 좌현 기계실을 명중시켰다. 북양함대에 대한 야간 기습작전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 공격은 놀라운 행운을 가져왔다. 조그마한 어뢰정이 상대한 군함은 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독일제 철갑선인 ‘정원(定遠)호’였던 것이다. 선체에 구멍이 나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류궁다오의 동쪽 측면에 선체를 기대어 포대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암초에 부딪힌 진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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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척의 강력한 전선 진원호. |
하필이면 불과 몇 달 전인 1894년 11월 14일 새벽, 정원호의 자매함인 ‘진원(鎭遠)호’도 사고를 쳤다. 황해해전에서 입은 상처를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웨이하이만에 진입하다 암초에 부딪혀 파손이 심각해진 것이다. 유일하게 대형 군함 수리가 가능했던 뤼순항 조선소는 이미 일본군에 함락된 상태였다. 결국, 진원호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함장 린타이쩡(林泰曾)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자살했다. 얼마 전 북양함대를 대표하는 정원호와 진원호는 세계해전사에도 길이 남은 황해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를 맞이해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한 바 있었다. 이들의 어이없는 운명은 청일전쟁의 패배를 암시했다.
■리홍장의 군함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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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북양해군의 창설 주역 리홍장. |
전설적인 군함 정원호와 진원호를 알려면 우선 북양해군의 건설자 리홍장(李鴻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제1, 2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인들은 영국 함선 한 척 제대로 침몰시키지 못한 채 일방적인 패배를 맞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서양 오랑캐에게 뒤처지는 것은 중국문화가 아니라고 믿었다. 단지 ‘견선리포(堅船利포, 견고한 함선과 예리한 대포)’로 상징되는 군함과 대포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했다. 외국에서 무기만 들여오면 서양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군함 구매에 나섰다.
■모기를 닮은 포선: 문자선
1874년 일본이 대만 섬을 침공한 대만사건이 일어났다. 청조 내부에서 대규모 해양방어(海防)논쟁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리홍장이다. 그는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을 겸임하면서 북양수사(1875년)를 만들었고, 훗날 근대적 함대인 북양해군(1888년)을 창설했다. 우선 항구를 방어할 수 있는 소형 포함 구매에 나섰다. 리홍장을 도와준 인물은 해관총세무사인 영국인 하트(Robert Hart)였다. 그는 영국 암스트롱 공사를 통해 가격이 저렴하면서 철갑선을 공격할 수 있는 소형 포함 문자선(蚊子船)을 구입했다. 이 포선은 작은 선체에 거포를 장착했다. 겉모양이 모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문자선이라 불렸다. 리홍장은 단번에 철갑선을 구매하고 싶었지만, 재정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하트의 제안에 따랐다.
■조선과 인연 깊은 순양함: 초용과 양위
1879년 일본이 류큐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자 다시금 해양 위기가 고조되었다. 문자선과 같은 소형 포함은 항구를 방어할 뿐 연해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청의 주적이 해국 일본임을 실감한 리홍장은 일본군함을 이기기 위해 신형 군함 구매에 나섰다. 이번에도 대형 철갑선을 구매하고자 했다. 그런데 재정상 이유로 반대하는 하트의 주장에 또다시 가로막혔다. 영국 정부와 연락하며 중국의 해군총사령관을 꿈꾸던 하트의 희망대로 영국제 순양함 초용(超勇)호와 양위(揚威)호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척의 순양함은 철갑선과 직접 충돌해 이길 수 있는 당각(撞角)을 갖추었다고 선전했다. 초용호와 양위호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황해를 건너 조선으로 출동한 배로 우리 역사와 인연이 깊다. 하지만 어뢰애호가였던 리홍장은 처음 약속과 달리 순양함이 작아 어뢰정을 탑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게다가 군함 건조가 정해진 기한보다 늦어지고 정적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하트에 대한 신뢰를 접었다.
■증기시대 해군 주력 철갑선: 정원과 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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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정원호. 현재 중국 웨이하이시 항구에 정박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리홍장은 무기거래선을 영국에서 독일로 바꾸었다. 신임 주독공사이자 과학기술자인 리펑바오(李鳳苞)를 통해 독일 불칸조선소와 꿈에 그리던 철갑선 두 척을 계약했다. 이것이 진원호와 정원호라 불린 바로 그 군함이다. 독일식 모델과 영국식 모델의 장점을 결합시킨 최신식 철갑선이었다. 군함 내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산 크루프 대포가 안장되었다. 리홍장이 좋아하던 어뢰정도 함께 실렸다. 진원호와 정원호는 제작부터 운송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영국 전문가들의 독일군함에 대한 혹평, 뇌물수수를 둘러싼 리펑바오에 대한 탄핵, 청·프전쟁에 따른 군함의 인수 지연 등을 겪은 뒤에야 겨우 리홍장의 손에 넘겨졌다. 그리고 제1세대 해군유학생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류부찬(劉步蟾)과 린타이쩡이 두 철갑선의 함장이 되었다. 정원호와 진원호를 중심으로 몇 척의 순양함과 여러 척의 포선이 합쳐져 새로운 편제를 이루었다. 기존의 ‘북양수사’가 근대적 함대인 ‘북양해군’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작전범위가 항구와 연해를 넘어 대양으로 나아갔다. 청과 일본의 해군력이 뒤집어져 동북아 해양질서가 바뀌는 듯했다. 그때는 알았을까? 군사력 경쟁이 결국 전쟁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정원호와 진원호의 몰락
청일전쟁이 막바지였던 웨이하이웨이의 전세가 악화되어 정원호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1895년 2월 9일 오후 함장 류부찬은 배 한가운데 다량의 폭약을 장치해 폭파시켰다. 그날 밤 류부찬은 자신의 청춘과 함께했던 정원호를 추억하며 자살했다. 평소 “구차하게 군함을 잃기보다 반드시 자신을 희생한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임무를 버리고 도망친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정원호는 자폭 후 류궁다오의 동부 해안가에 버려졌다. 일본군은 정원호를 활용할 수 없자 선체를 다시 폭파해 철저하게 파괴했다. 한편 고장 난 자매함 진원호는 일본군의 전리품이 되었다. 뤼순으로 옮겨져 수리를 거친 후 일본함대에 편입시켰다. 훗날 이 군함은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여 뤼순전투와 황해해전 및 대마도해전 등에 동원되었다.
■‘신’북양해군을 추구하는 중국
정원호와 진원호는 청말 북양해군이 소유한 아시아 최대의 군함으로 과거 정화(鄭和)함대의 기함인 보선(寶船)의 영광을 잇는 배였다. 하지만 정화함대가 역사 속에서 홀연히 사라졌듯이 이들 철갑선도 서글픈 추억만을 남긴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현재 정원호는 복원되어 류궁다오 맞은 편 웨이하이시 항구에 정박해 박물관으로 변신한 후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해군이 랴오닝호나 산둥호 같은 항공모함을 연이어 건조하면서 해군강국을 외치는 데는 이런 비운의 역사를 만회하려는 간절함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일대일로와 관련해 ‘해양중국’을 구상하는 중국인에게 ‘신(新)’북양해군의 건설은 중국몽(中國夢)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일 것이다.
조세현 부경대 사학과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