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재휘의 시네필]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미세한 변화

영화 ‘패터슨’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1-18 18:41:45
  •  |  본지 21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네가 현재 사는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다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크고 작은 일이 다시금 되풀이된다.(중략) 너는 이것이 다시 한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 중에서)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은 철학자 니체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과도 같은 영화다.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의 이름은 ‘패터슨’이다.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상에는 이렇다 할 사건의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한 소시민의 반복되는 삶의 일주일을 일체의 흥분과 자극 없이 따라간다.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시간 맞춰 일어나 아내와 대화하고, 버스를 운전하며 패터슨 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일을 마친 뒤 돌아와서는 애완견과 산책하다 바에 들르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을 느낀다. 또한 그는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하다. 일하는 틈틈이 일상에서 건져 올린 시상을 그만의 비밀노트에 적어두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정한 자장(磁場)에 묶여있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일상. 그러나 자무시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비범한 무언가를 발견해내려는 예민한 시인의 감각으로 영화를 직조한다. ‘패터슨’의 카메라는 집과 정차장, 버스, 바 등 항상 같은 곳을 맴돌지만, 매번 각도와 위치를 바꾸며 공간을 다르게 바라본다. 승객들의 수다는 내용이 달라지며, 곳곳에 쌍둥이가 출현하지만 각기 위상을 달리하는 다른 사람들이다. 같은 길을 지나가더라도 언제나 똑같은 풍경과 사물을 목격하지는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비유처럼 흐르는 물을 바라보더라도 그 물은 이미 지나간 물과는 다르며, 설령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로부터 얼마든지 새로운 시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내가 장식한 집안의 벽지와 커튼, 컵케이크에서 보듯, 영화의 미장센은 원형과 물결무늬라는 두 개의 패턴을 자주 보여준다. ‘순환과 흐름’의 모티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삶은 큰 틀에서 바라보면 동일한 양상의 반복처럼 여겨지지만, 세밀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다름과 변화가 미처 의식하지도 못하는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평소 작업실에 두었던 노트를 무심코 소파에 던져둔 패터슨의 상황처럼 그런 차이들이 결정적인 순간 삶의 국면을 뒤바꾸게 된다.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며 흐르고, 그 안에서 동일한 것들이 무한히 되풀이되지만, 이러한 순환의 근간에는 무수한 차이와 잠재적 다양성, 변화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동일성의 이면에 자리한 ‘차이 그 자체’(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자무시는 이 점을 이해하는 영상철학자이다.

   
일상의 세부로부터 길어 올린 언어의 결이 겹겹이 쌓여 한 편의 시를 이룬다. 비록 비밀 노트는 시간의 재가 되었지만, 패터슨은 “이것이 삶이었던가?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외치며 새로 받은 노트의 빈 여백에 풍부한 사람의 무늬(人文)를 새겨나갈 것이다. 영화 ‘패터슨’은 일상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사유하려는 노대가의 역작이다. 차이를 긍정하며 허무로부터 삶을 구해내려는 일말의 긍정이 이 영화에 있다.

영화평론가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해양문화의 명장면
조선 전기에도 통신사가 있었다
정두환의 공연예술…한 뼘 더
‘사람이 먼저’인 문화환경을 생각한다
국제시단 [전체보기]
어둠이 내릴 때 /박홍재
단풍 들어 /정온
글 한 줄 그림 한 장 [전체보기]
코 없는 사람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미래를 위하여
리뷰 [전체보기]
경계인 된 탈북여성의 삶, 식탁·담배·피 묻은 손 통해 들춰
방송가 [전체보기]
MC 이휘재 vs 성시경 ‘미식여행’ 승자는
위기 이겨낸 기업…비법은 직원 기살리기
새 책 [전체보기]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外
마거릿 대처 암살 사건(힐러리 맨틀 지음·박산호 옮김) 外
신간 돋보기 [전체보기]
자살에 이르게 한 심리흔적
현실에서 음악가로 산다는 것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무자연(舞自然)-점화시경, 장정 作
木印千江 꽃피다-장태묵 作
어린이책동산 [전체보기]
31가지 들나물 그림과 이야기 外
아이가 ‘다름’을 이해하는 방법 外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샛별 /정애경
가을산 /이성호
이기섭 8단의 토요바둑이야기 [전체보기]
제35기 KBS바둑왕전 준결승전
2016 이민배 본선 4강전
이원 기자의 Ent 프리즘 [전체보기]
허세 대신 실속 ‘완벽한 타인’ 배워라
봄여름가을겨울, 음악과 우정의 30년
조재휘의 시네필 [전체보기]
암수살인과 미쓰백…국민 국가의 정상화를 꿈꾸며
상업영화 후퇴·독립영화 약진…‘뉴시네마의 여명’
책 읽어주는 남자 [전체보기]
가슴에 담아둔 당신의 이야기, 나눌 준비 됐나요 /정광모
가족갈등·가난, 우리 시대 청춘들 삶의 생채기 /박진명
책 읽어주는 여자 [전체보기]
눈물과 우정으로 완성한 아이들 크리스마스 연극 /안덕자
떠나볼까요, 인생이라는 깨달음의 여정 /강이라
현장 톡·톡 [전체보기]
지역출판 살리려는 생산·기획·향유자의 진지한 고민 돋보여
‘영화철학자’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패션·예술 유산 한곳에
BIFF 리뷰 [전체보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퍼스트맨
BIFF 인터뷰 [전체보기]
‘렛미폴’ 조포니아손 감독, 마약중독에 대한 인간적 접근…“그들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에요”
감독 박배일 '국도예술관·사드 들어선 성주…부산을, 지역을 담담히 담아내다'
BIFF 피플 [전체보기]
‘국화와 단두대’ 주연 배우 키류 마이·칸 하나에
제이슨 블룸
BIFF 현장 [전체보기]
10분짜리 가상현실…360도 시야가 트이면 영화가 현실이 된다
BIFF 화제작 [전체보기]
‘안녕, 티라노’ 고기 안 먹는 육식공룡과 날지 못하는 익룡의 여행
묘수풀이 - [전체보기]
묘수풀이 - 2018년 11월 14일
묘수풀이 - 2018년 11월 13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 10월 9일
오늘의 BIFF - 10월 8일
이기섭 8단의 바둑칼럼 [전체보기]
제 5회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
제 5회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
정천구의 도덕경…민주주의의 길 [전체보기]
致虛守靜
陶冶而變化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

무료만화 &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