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럼버스 대서양 항해 지원 기점
- 스페인 16세기에 세계 제국화
- 노예무역 사업하던 드레이크
- 식민지 출발 스페인 선박 약탈
- 후발국가 잉글랜드 성장 도와
- 엘리자베스 여왕 귀족 작위 수여
-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침공땐
- 해군 부제독 신분으로 맞서 격파
- 스페인 재산 가로챈 악당이지만
- 잉글랜드 입장에선 ‘국민 영웅’
19세기 영국(잉글랜드)은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거느린 1등 국가였다. 16세기에 이러한 지위는 에스파니아 차지였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지원을 기점으로 에스파니아의 해외 영토 획득은 꾸준히 증가하여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로까지 뻗어 나갔다. 세계 제국으로서 면모를 영국보다 앞서 에스파니아는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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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왕실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경로. 왼쪽 그림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모습이다. 박원용 교수 제공 |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왕실은 세계 제국이자 가톨릭을 대변하는 에스파니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신교 국가로서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에스파니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반출하는 금과 은을 잉글랜드 왕실의 권력 강화에 활용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 왕실의 해군력은 에스파니아의 최강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했다. 엘리자베스는 에스파니아의 지배력에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필요했는데, 프란시스 드레이크(1540께로 추정~1596)라는 ‘사략선 업자’가 그러한 도움을 제공했다.
■ 복수심을 가슴 깊이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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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 드레이크 초상화. |
드레이크가 처음부터 잉글랜드를 위해 에스파니아의 상선과 전함을 공격하는 데 전념한 것은 아니다. 드레이크는 사촌 형인 존 호킨스와 더불어 카리브해 섬들의 설탕 플랜테이션 운영의 필수 요소인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척해갔다. 아프리카 서해안 원주민을 생포해 카리브해 섬들과 중남미 아메리카 에스파니아 식민지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무역은 운송 과정에서 많은 노예가 사망했음에도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사업이었다.
에스파니아 왕실은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불법 무역을 자행하는 셈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호킨스와 드레이크의 배는 에스파니아 선박과 교전도 했고 에스파니아가 통제하는 항구도 습격하여 에스파니아 해군의 경계 대상이었다. 1568년 항해 도중 날씨 악화로 호킨스와 드레이크의 선단 일부가 파손되어 현 멕시코의 베라크루즈 인근 항구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 책임자였던 에스파니아 총독은 호킨스와 드레이크 선단의 노예 일부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정박을 허가하고 그들의 안전한 출항을 약속했다. 그러나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저지른 그동안의 ‘악행’이 갑자기 생각난 것일까, 총독은 약속을 어기고 호킨스와 드레이크 선단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선박만 간신히 살아남고 나머지 배들은 침몰하고 말았다. 드레이크가 에스파니아에 대한 복수심을 가슴 깊이 새기는 계기였다.
■ 현상금 걸린 ‘해적’, 귀족 되다
‘1568년 사건’ 이후 드레이크는 무역 선단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스페인 선박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에게 스페인 선박 공격을 허락하는 왕실의 허가장을 발행하여 드레이크에게 에스파니아 선박을 나포하고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1573년에는 남아메리카 포토시 광산 등에서 반출한 은을 가득 싣고 시에나로 향하는 에스파니아 선단을 드레이크가 공격했다. 강탈한 은을 자신의 선단에 전부 옮길 수 없어 15t 정도는 카리브해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2만 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은을 싣고 잉글랜드에 돌아갔다 하니 강탈한 은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드레이크의 에스파니아 선단 공격을 함께한 집단에는 에스파니아 식민지의 도망 노예집단 ‘시마론’도 있었다. 드레이크는 에스파니아 식민지에서 착취당했던 노예들의 불만을 활용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파니아 왕실에게 드레이크는 증오 그 자체였다. 펠리페 2세는 드레이크의 목에 2만 두카트, 현 화폐 가치로 수백만 달러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드레이크가 에스파니아 왕실에 끼친 손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드레이크는 1577년 120t의 기함 골든 하인드호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태평양, 인도양을 거쳐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역사적 항해에 나섰다. 태평양 연안의 북아메리카 항로 개척의 명분도 있었지만, 드레이크 원정의 주된 목적은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을 항해하는 스페인 선박의 약탈이었다. 드레이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1579년 3월, 현 샌프란시스코 연안에서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실은 카카푸에고호를 만났다.
드레이크는 상선으로 위장 접근한 후 기습으로 카카푸에고호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카카푸에고호에는 80파운드의 금과 26t의 은을 포함해 현 시가로 1200만 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보물이 실려 있었다 하니 1573년 약탈 규모를 훨씬 상회했다. 여기에 더해 향신료 산지인 몰루카 제도의 테르나테섬의 술탄에게서 엄청난 양의 향료를 선물로 받고 잉글랜드로 귀환했기에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항해에 따른 영국 왕실의 경제적 이익은 엄청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드레이크의 공적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1581년 4월, 드레이크의 골든 하인드 호에 승선하여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에스파니아의 시각에서 ‘해적’에 불과한 불한당이 잉글랜드의 상층 신분으로 격상되었으니 펠리페 2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해 보시라.
■ 무적함대를 깨다
1588년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응징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보냈을 때 드레이크는 이제 국가의 고위 관리로서 에스파니아에 대적했다. 영국 함대 부제독으로서 에스파니아의 침공을 막아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몇 차례 교전에도 어느 쪽도 유리한 전세를 잡지 못했다. 잉글랜드 도버에서 34km 거리의 칼레 연안까지 다다른 무적함대에 드레이크는 색다른 전술을 선보였다. 대형을 유지한 에스파니아 함대에 화공선을 보내 대형을 흩뜨린 다음 가까운 거리에서 화포 사격을 가했다. 칼레의 전투에서 잉글랜드 함선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지만, 무적함대는 두 척이 격침되고 세 척이 나포됐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에스파니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무적함대의 손실은 엄청났다. 에스파니아를 떠났을 때 선박 수는 132척이었지만, 돌아온 선박 수는 65척에 불과했다. 이후 무적함대는 그 이름에 합당한 위상 회복 기회가 없었고, 해양강국 에스파니아의 위상도 하락했다.
드레이크는 왕실의 허가를 받아 경쟁국인 에스파니아 선박을 약탈하고 공격하는 ‘사략선 업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에스파니아에 귀속되어야 할 재산을 중간에 가로채 잉글랜드로 가져온 드레이크는 잉글랜드에서는 ‘국민 영웅’이었다. 새롭게 열린 해양 공간을 선점한 에스파니아를 국가의 공적 기구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잉글랜드의 힘이 모자랐다. 국가 권력을 도와 에스파니아에 대항할 원군이 필요했다. 드레이크는 잉글랜드 왕실이 기대했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잉글랜드가 에스파니아를 누르고 새로운 강자로 부각할 기회를 제공했다. 해양 진출의 후발 국가에 ‘해적’은 선두 국가를 따라잡을 여지를 제공했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탄압 대상은 아니었다.
박원용 부경대 사학과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