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존 동아시아 最古 세계지도
- 커다란 한반도·왜소한 日 대비
- 아프리카 대륙도 정확히 담아
- 연안 따라 표시된 수군기지
- 강력했던 조선 해군 나타내
- 이후 지도 300여개 만들었지만
- 육지에 얽매여 ‘海圖’ 등한시
- 지리정보의 폐쇄성도 한 몫
- 조잡한 세계지도만 나돌게 돼
- 유럽 따라 바다지도 만든 日
- 목판·동판 인쇄해 민간에 판매
- 결국 바다에 대한 지식·활용
- 두 나라의 근대화 흐름 결정
근대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바다에 대한 지식과 활용이 근대의 지평을 결정하였다. 수평이 지평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제국은 육지를 아우른 결과였으나, 근대의 제국은 바다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조선은 왜 근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그 해답은 지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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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2년(조선 태종 2년)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혼일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며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반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근우 교수 제공 |
■혼일도
조선은 140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혼일도)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동으로는 일본열도부터 서로는 아프리카까지 나타낸 세계지도이자,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지도 중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다.
놀랍게도 ‘혼일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이 확실히 그려져 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한 때가 1486년이고, 이곳을 지나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것은 1498년이다. 그보다 80여 년 전에 조선이 제작한 ‘혼일도’에 이미 아프리카 대륙 전체 모습이 거의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알렉산드리아 팔로스의 등대, 나일강과 그 수원지인 달의 산도 표시되어 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의 지리상의 발견을 배우면서 그들의 ‘발견’만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 지도는 몽골제국이 입수한 정보를 고려가 입수하였고, 이를 다시 조선이 이어받아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부분은 중국의 지도를 참조했을 테지만, 조선 지도는 스스로 제작했을 것이고, 거기에 일본에서 입수한 일본지도를 적당히 배치하였다. 당시 유럽 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미지의 공간, 가상의 공간은 일체 배제되었다.
■혼일도 속 수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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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일도’에 표시된 부산 근처 수군 기지들(바닷가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위)과 아프리카·아라비아. |
‘혼일도’ 속의 조선은 당당하다. 중국을 지도의 한가운데 그렸지만 동쪽에 자리한 조선은 중국과 겨룰 자신이 있다는 듯 그 크기를 과시하고 있다. 일본은 바다 속에 기울어진 채 왜소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 건국 직후의 기개가 느껴진다.
지도를 좀 더 들여다보면, 해안을 따라서 둥근 원들이 그려져 있다. 자칫 섬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이 설치한 수군기지다. 부산 주변을 보면, 서생포, 두모포, 해운포, 부산포, 안골포가 보인다. ‘혼일도’는 단순히 지리를 보여주는 지도가 아니었다. 조선이 왜구의 침략을 어떻게 막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왜구를 막기 위해 극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켰고, 세종 대에는 수군의 수가 5만 명이 넘었다. 지금 우리나라 해군의 수가 5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많은 수군을 양성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강력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에 이르러 진가를 발휘했다. 수십 문의 함포를 갖춘 수백 척 전선으로 일본군을 해상에서 제압할 수 있었다. 일본이 50만 정의 화승총으로 무장한 세계 최강 육군을 보유했다면,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으로 맞서 싸웠다. 고려 시대 최무선의 진포 대첩(1380년)은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한 해상전투였다. 이후 조선도 해상에서 왜구를 포착하여 화포로 침몰시키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공로를 이순신에게만 돌릴 수 없다. 조선이 만들어내고 운용한 시스템도 중요했다.
‘혼일도’ 이후에도 조선은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실로 다양한 지도가 있다. 300개가 넘는 현 단위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도의 대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대동여지도’조차 조선이 제작한 지도 전체에서 보면 빙산의 일각이다.
■삼남해방도
그러나 땅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가 아니라 바다를 그린 해도로 가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조선에는 해도가 없다. 조선 후기 ‘삼남해방도(三南海防圖)’가 그나마 자세하게 바닷길을 나타낸다. ‘삼남해방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지도는 충청·전라·경상도의 해안과 바다의 방어체제를 그렸다. 섬 사이를 지나는 수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각 지점 사이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부산 주변을 보면 거제도, 대마도, 울산 등으로 이어진 해로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삼남해방도’는 연안의 물길을 그리는 데 그쳤다. 철저하게 연안에 집착한다. 다도해에서도 ‘바깥 바다(外洋)’라고 표시할 지경이다. 항해를 위한 해도(chart)가 아니라 육지의 연안을 그린 지도(map)다. 바다는 외부로 향한 진출보다 그저 침략과 일탈의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의 ‘천하도’
조선 후기 세계지도는 퇴보를 계속하였다. ‘혼일도’는 자취를 감추고 ‘천하도’라는 왜곡된 지도가 유행한다. 한가운데 중국을 그리고, 조선은 그 옆에 작은 반도로 그렸다. ‘혼일도’의 지리정보는 사라지고, 지도 주변에 가상적인 원형의 대륙과 바다가 나타난다. 심지어 이런 ‘천하도’가 ‘혼일도’를 심하게 왜곡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조선 내부는 대단히 자세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계를 벗어나면 애매하기 그지없는 세상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큰 학자 최한기가 마테오 리치의 ‘만국전도’를 한 차례가 그렸지만, 개인적 관심에 머물렀고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일본의 세계지도와 해도
이웃 일본은 달랐다.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인의 거주 지역을 만들어 놓고, 그들로부터 꾸준히 세계가 돌아가는 사정을 듣고, 신대륙을 포함한 세계지도도 입수하였다. 세상의 다양한 인종을 함께 그린 세계지도까지 제작하였고, 이를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유럽의 해도를 모방하여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해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일본 자체에 대해서도 아주 정밀한 지도를 제외하고는 민간에 유통되도록 하였고, 목판·동판으로 인쇄해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쉽게 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기에, 지도를 그린 병풍도 만들고, 심지어 자기 나라 지도를 그려 넣은 접시도 만들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도를 사서 자기 나라의 형편도 알고, 당시 알려진 세계 모습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오기 전에 이미 네덜란드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페리 제독의 목적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지도를 깊이 감추어 두려고만 하였다. 규장각과 장서각에 많은 지도들이 소장되어 있는 이유다. 시중에 나도는 지도는 대단히 조잡한 지도로, 겨우 한반도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해도는 단 한 장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육지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바다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리정보를 비밀에 붙이려고 한 조선은 근대라는 흐름에 올라탈 수 없었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바깥세상에 관심이 있는가?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