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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천사의 손길 /이화정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12-31 18:56:15
  •  |   본지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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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 ‘천사호출’이잖아요. 엄마는 천사래요.
- 그러니 아줌마가 우리 엄마 좀 불러주세요

- 놀이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숙은 말했다
- 이제 엄마라고 불러. 지금부터 내가 엄마야
- 아줌마가 천사였다고요. 아빠가 그랬어요

남자는 욕의 질감을 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썅- 은 길고 늘어지게, 년아-는 짧고 신속하게 발음함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적당한 모욕감과 충분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택시를 기다린 지 3분이 지났다고 말했다. 3분요? 경숙이 되묻자 그때부터 남자가 융숭한 욕의 향연을 시작한 것이다. 지독한 욕을 해대면서도 남자는 언성을 높이거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위험한 사람이라고 경숙은 생각했다. 죄송하다고, 최대한 죄송하게 들릴 수 있도록 말했다.
경숙의 불면은 불치에 가까웠다. 선호를 잃고 시작된 그것에는 어떤 약도 듣지 않았다. 밤을 낮과 같이 명징한 정신으로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밤이 오 년째 이어지자 경숙은 차라리 그 시간에 돈을 벌자 싶었다. 남편의 짐도 덜고 선호를 잊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과 부대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밤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천사호출’ 이었다. 택시가 필요한 손님과 빈 채로 운행하는 택시를 연결하는 일. 밤 열한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모니터를 보기만 하면 되었다.

익명이 주는 편리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은 함부로 말했고 쉽게 약속을 어겼다. 경숙이 처음부터 손님에게 고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같이 막말을 하며 전화기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아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화를,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며 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너 거기서 딱 기다려, 내가 찾아갈 테니까!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처음 보는 남자의 주먹이 경숙의 얼굴로 날아왔다. 넘어진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지근지근 밟았다. 남자가 폭력을 멈춘 것은 웃음 때문이었다. 맞을수록 경숙의 웃음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남자는 발길질을 거뒀다. 이런 미친, 서둘러 사무실을 떠났다. 남자가 떠나고도 한참을 경숙은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완벽하게 숨는 것은 불가능 해, 큭큭. 경숙이 중얼거렸다. ‘천사호출’을 검색바에 써 넣고 엔터키 한 번만 누르면, 주소에다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었다. 나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냐, 배를 움켜쥐었다. 아픈 건지, 웃긴 건지 헷갈렸다. 웃음을 멈췄다. 다리를 뻗고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웠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선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제야 경숙은 시멘트 바닥의 한기가 느껴졌다.

“우리 엄마 좀 불러주세요.”

꼬마 목소리에 경숙은 짜증이 일었다. 방금까지 모르는 남자에게 진탕 욕을 먹었는데, 꼬마의 장난전화까지 상대하려니 급속하게 피곤해졌다. 두산 위브더 제니스 /109동/ 1906호. 전화선과 연결된 모니터에 화면이 떴다. 이 도시에서 가장 고급이라는 아파트였다. 벽시계는 새벽 세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 시간만 견디면 된다, 경숙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꼬마의 전화는 처음이 아니었다. 종종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 와 자기 엄마를 불러달라고 졸랐다. 경숙은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전화를 끊었다. 어린아이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일단 말을 섞으면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요. 제발 끊지 마세요! 수화기를 내려놓던 경숙의 손이 멈칫했다. 꼬마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리고 그 말은 전단지에 실린 얼굴사진을 대충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경숙이 숱하게 애원하던 말이기도 했다. 잠깐, 잠깐만요. 제발 한 번만 더 봐 주세요.



경숙과 선호는 뮤지컬을 보았다. 뮤지컬이라 부르기도 머쓱할 만큼 동네 문화센터의 그것은 허술했지만, 선호는 즐거워했다. 쪽진 머리의 며느리 탈을 뒤집어쓴 배우가 방귀를 뀔 때마다 박수를 치며 깔깔댔다. 공연이 끝나도 꼼짝 않다가 그 배우가 인사를 하러 무대에 오르자 기어이 기념사진까지 찍고서야 일어섰다.

더워! 차에 타자마자 선호는 손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더웠다. 일부러 지하에 주차했는데도 차 안 공기는 숨이 막혔다. 바깥의 날씨가 짐작되었다. 경숙은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다. 고개를 돌려 아이에게 금방 시원해질 거라고 말하며 윙크했다. 선호가 입모양으로 뽀뽀를 보냈다.

경숙과 선호는 집으로 가기 전 빵집에 들러 빙수를 포장하기로 했다. 오래된 동네 빵집이었는데, 팥과 우유로만 맛을 낸 깔끔한 빙수가 그들의 입맛에 맞았다. 유명 프랜차이즈의 요란한 맛에 질린 사람들이 SNS에 이 집 빙수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최근 손님이 늘고 있었다. 빵집에 도착했을 때 뒷좌석의 선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조그만 콧구멍으로 옅은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었다. 꽤 단 잠이었다. 선호야, 선호야. 경숙이 이름을 불렀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어깨를 흔들자 양 눈썹머리를 구기며 귀찮아했다. 밖은 여전히 더위가 대단했다. 경숙은 잠든 선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방귀쟁이 며느리라도 만나는지 양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시동을 끄면 차 안은 찜통이 될 거라고 경숙은 생각했다. 자동차 키를 꽂아 둔 채 에어컨을 적당한 온도로 낮췄다. 조수석의 가방에서 지갑만 꺼내 차에서 내렸다. 경숙은 선팅이 짙은 차창에 붙어 서서 손차양을 만들었다. 뒷좌석의 잠든 선호를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빠르게 빵집을 향해 걸었다.

소셜네트워크의 위력으로 최근엔 몇 십 분씩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는데, 다행히 빵집 안이 한산했다. 계산대에는 빙수 컵을 받아들고 계산을 하는 여자 하나밖에 없었다. 경숙은 여자 뒤에 섰다. 삼십 대 초반처럼 보이는 여자는 돈을 내밀며 말했다. 현금 영수증요. 그리고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팔육이이, 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확인했다. 아니요 팔, 육, 일, 이, 요! 여자가 또박또박 끊어 다시 말했다. 경숙은 가게 밖을 보았다. 건물 모퉁이에서 꺾어지는 위치에 자리한 이 가게에서는 도로변의 경숙 차가 보이지 않았다. 경숙은 목까지 채운 원피스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여자가 거스름돈을 돌려받자 경숙은 계산대로 바짝 다가갔다. 컵 빙수 두 개를 주문하며 카드를 내미는 손 위로 방금 전 여자의 손이 겹쳐졌다. 명함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도요. 열 번을 오면 열한 번째는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쿠폰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경숙의 돈을 받다 말고 여자의 쿠폰에 도장을 꾹, 찍었다.

한 손엔 지갑을 다른 손에 빙수 두 개를 넣은 캐리어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의 뛰듯이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경숙은 자신의 차가 있던 자리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서성거렸다. 이 상황이 퍼뜩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없었다. 자신의 차도, 아들 선호도 보이지 않았다. 선호야, 경숙이 중얼거렸다. 팔월의 아스팔트 위로 빙수가 쏟아졌다. 보도블록에 우윳빛 얼음이 얼룩을 만들었다. 살 오른 통팥이 조그만 무덤처럼 쌓였다.



꼬마의 전화는 계속되었다. 우리 엄마 좀 불러주세요, 네? 로 시작하고 잠깐 잠깐만요, 로 끝나는 똑같은 패턴이었다. 그날, 경숙은 전화를 그냥 내려놓지 못했다. 꼬마의 흐느낌 때문이었다. 엮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울음이 마음에 걸렸다. 이쯤 되니 장난전화의 이유도 알고 싶었다. 장난 아니에요! 꼬마는 쀼루퉁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이모님과 유치원을 가는 길에 ‘천사호출’ 사무실이 있다. 등·하원 길에 늘 그 간판을 봤는데 ‘천사’는 알지만 ‘호출’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에서 사전 찾는 법을 배웠다. ‘ㅎ’에서 ‘호출’을 찾았더니 ‘어떤 사람을 일정한 곳까지 오도록 불러 냄’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빠가 깨어 있는 시간에는 전화를 할 수 없다. 못하게 말리면서 우시기 때문이다. 꼬마의 얘기였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러니까 네 엄마를 왜 여기서 찾느냐고. 경숙은 ‘호출’과 ‘엄마’ 가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그랬어요. 엄마는 천사라고, 그래서 우리랑 같이 살 수 없다고요. 그러니 아줌마가 우리 엄마를 좀 불러주세요. 그래서 전화 한 거예요. 거기가 ‘천사호출’ 이잖아요. 꼬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전화를 끊은 경숙을 원망하는 말투였다. 아이는 엄마가 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다고 믿을 수도 있다. 선호는 늘 자신이 바라던 선물을 정확하게 배달하는 산타의 존재를 석연치 않아했다. 그렇다고 그 산타할아버지가 거짓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다섯 살이라고 했다. 그럴 수 있는 나이였다.

그날 이후부터 경숙은 지금은 날개 손질 중이래, 불쌍한 사람 도우러 출동했다는데? 등, 엄마를 호출해 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 아이와 통화를 이어갔다. 그런 날이 거듭되자 꼬마는 엄마보다 경숙과의 대화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짝꿍이 특별한 날도 아닌데 한복을 입고 유치원에 왔다거나, 아빠의 요리에는 요상한 맛이 난다는 말도 했다. 시시한 얘기들이었지만 들어줄 만했다. 며칠 동안 전화가 오지 않으면 슬그머니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아줌마는 낮에 뭐해요? 꼬마가 물었을 때 경숙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서 웅크리거나 누워있는 게 다였다. 텔레비전을 켜지도 않았고 외출도 안 했다. 그러다보니 몇 없던 친구마저도 관계가 끊어졌다. 남편이 봐 온 식료품들을 뒤져 저녁을 차려놓고 나오는 것이 집에서의 유일한 일과였다. 그나마 저녁을 차리기 시작한 것도 불과 얼마 전부터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경숙의 목표는 오로지 ‘살아 있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죽어질 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는 간단히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쉽게 고통을 끝내는 것은 죗값을 치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 생애를 죽도록 버티는 것, 그것만이 선호를 잃은 죄의 형벌이라 생각했다.

구미호 같아. 선호를 잃고 경숙은 새엄마의 그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뭉치 고기를 소스에 찍어 연신 입으로 가져가는 경숙을 향해 새엄마는 구미호 같아, 그렇게 말했다. 유난히 육회를 좋아하는 경숙을 위해 아버지가 특별히 좋은 고기로 부탁해 놓은 단골식당에서였다. 경숙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느라 젓가락질을 멈추고 새엄마를 보았다. 구미호 몰라, 구미호? 어린애 간 빼 먹는다는 구미호말이야. 너 그거 먹는 모습이, 꼭 구미호 같다고. 입술은 왜 그렇게 빨개가지고. 경숙은 유난히 입술색이 붉었다. 립스틱을 발랐다며 종종 교무실에 불려가기도 했다. 동생은 내가 알아서 잘 볼 테니까, 넌 앞으로 그 옆에 가지 마. 괜히 불길하다 얘. 얼마 전 새엄마는 아기를 낳았다. 새엄마에게는 노력해도 애틋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지만 동생은, 예뻤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팽개치고 아기부터 안았다. 솜털이 가득한 투명한 얼굴에 연신 뽀뽀를 해댔었다. 여기 오길 잘했어요, 여보. 우리 경숙이가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네요. 자리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새엄마는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경숙은 식욕을 잃었다.



그럼,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경숙은 그러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꼬마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오 년만의 낮 외출이었다. 꼬마는 얼굴도 몸도 동글동글한 아이였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 나이다웠다. 아이의 집은 깔끔했지만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부유해보였지만 행복한 기운은 없었다. 제 친구예요. 여긴 이모님이시고요. 꼬마가 이모님과 나를 번갈아보며 소개했다. 진짜 이모라기보다 집안일 봐주는 사람을 칭하는 것이었다. 살짝 고개를 까닥이던 이모님은 뒤돌아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소리가 새지 않게 손으로 전화기를 감싸고는 낮게 말했다.

꼬마의 방으로 갔다. 꼬마는 책장에서 블루마블 게임을 꺼내왔다. 연예엔터테인먼트에 관한 것이었다. 소속사 가수의 곡이 표절시비에 걸려 경숙은 돈의 일부를 잃었다. 다시 돈을 좀 모으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에 아이돌 출신 영화배우의 성 동영상이 유출되는 바람에 가진 돈을 모두 날렸다. 이게 뭐야, 경숙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자신이 이겨 신이 나 보였다. 꼬마와 손바닥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경숙은 문득 자신이 낯설게 여겨졌다. 더 있다 가라는 꼬마의 말에도 서둘러 일어섰다. 구두를 신고 막 손잡이를 돌리는데, 밖에서 디지털 도어기의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숙이 문을 미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밖에서 잡아당겨 경숙의 몸이 앞으로 홱 쏠렸다. 남자의 얼굴과 거의 닿을 지경이었다. 아빠! 반가움이 묻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모님이 급히 전화를 건 사람이 그였던 모양이다. 경철의 눈은 잔뜩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경숙을 단숨에 파악하겠다는 듯 바쁘게 훑었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과 붉은 입술, 회색 톤의 정장 원피스 차림의 경숙은 어느 정도 그를 안심시킨 것 같았다. 인사를 하고 나서는 경숙의 등 뒤로 경철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낮이면 거의 꼬마 집에 갔다. 아이가 원하기도 했지만 경숙도 꼬마와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간식을 만들어 같이 먹기도 했고 꼬마의 숙제를 돕기도 했다. 유치원 숙제는 생각보다 어른 손이 많이 필요했다. 표정이 밝아지고 유치원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유치원 선생님의 말을 경철이 전했다. 경숙은 경철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제야 천사호출로 출근했다. 꼬마는 가지 말라고 매달렸고 아이의 아빠는 뒤에서 꼬마를 감싸 안으며 말렸다. 흔한 광경이었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줌마, 그게 정말이에요? 꼬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새벽 천사호출 사무실의 정적을 깨웠다. 그러지 마, 글쎄 아니라니까. 경철의 음성이 섞였다. 친구가 집에 놀러왔는데 엄마는 어딨냐고 해서 우리 엄마는 천사라고 했더니 나보고 바보랬어요. 천사는 없다고. 천사가 왜 없어, 천사 있어. 꼬마를 달래며 경철이 말했다. 그도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꼬마는 소리쳤다. 죽은 거라면서요? 친구가 그랬어요. 죽은 거라고. 너희 엄마는 죽었다고! 그 순간, 경숙은 잠자코 쥐고 있던 수화기를 입 가까이 끌어당겼다. 중얼거림은 점차 외침이 되어갔다. 죽은 거 아니야, 안 죽었어! 선호는 죽지 않았어!

선호는 발견되지 않았다. CCTV 어디에도 선호는 없었다. 목격자도 용의자도 없었다. 희한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거의 증발수준이었다. 남편과 경숙은 차량에 현수막을 달고 전국을 다녔다. 선호와 관련된 사소한 제보에도 땅 끝까지 달려갔다. 언론에 사연이 알려지면 더 많은 사람이 선호에게 관심을 가질 것 같아 기자들을 만나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이도저도 아닌 날에는 전단지를 들고 거리에 섰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선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삼 년쯤 지나자 돈이 바닥을 드러냈다. 남편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경숙은 혼자 거리로 나섰다. 주말이면 남편도 합세했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소득 없는 세월이 흘렀다. 잊자, 남편이 말했다. 경숙은 그의 뺨을 후려쳤다. 너나, 너나 잊어! 경숙은 납득할 수 없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잠든 선호의 모습이 잡힐 듯 생생한데, 그 애를 잊자니. 분노로 몸이 떨렸다. 그것은 꼭 남편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전단지를 대충 보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나고, 엄마 손을 잡고 걷는 모자에게도 화가 났다. 빙수를 사며 공짜 쿠폰을 찍던 여자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고, 그날 선호를 차에 둔 채 빙수를 사러 간 자신에게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남편은 현실로 돌아갔고,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무당을 한번 찾아가봐. 신 내린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그럴수록 영험하다고도 했다. 경숙은 선호만 찾을 수 있다면 귀신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

바닷가를 걸으며 운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젊은 무당은 그렇게 말했다. 바다야. 파도가 보여. 엄마를 부른다, 목이 다 쉬었네. 쯧쯧. 선호가 엄마를 부르며 운다니, 선호의 목소리가 경숙의 살점들을 뚫고 파고들었다. 경숙은 지갑의 돈을 모두 꺼내 무당에게 주고 그길로 바다로 갔다. 바다란 바다, 섬이라는 섬은 모조리 다녔다. 그러나 선호는, 자신을 부르며 운다는 선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해의 끝 어느 섬으로 갔다. 마지막 섬, 마지막 바다였다. 남편은 따라 나서지도 않았지만 경숙을 말리지도 않았다. 그 작은 섬을 돌고 또 돌았는데, 선호는 없었다. 갈라지고 짓무른 발바닥까지 어둠이 내렸다. 섬 여러 개가 열을 지어 나는 새 같다는 그 작은 섬에서 경숙은 꾸루룩꾸루룩 울었다. 고개 떨군 경숙의 목덜미 위로 한 무리의 새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굿을 하자, 무당이 명쾌하게 말했다. 말없이 돈을 내어주는 남편의 등은 가난했다. 굿판은 바닷가에 차려졌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어느 왕의 무덤이 있는 바다였다. 큰 굿판이었다. 온갖 과일이 양푼이에 가득 찼다. 웃는 돼지머리에 삼지창이 꽂혔다. 잔뜩 쌓아올린 고기 편육에는 긴 검이 놓였다. 술과 전 옆에는 선호가 좋아하던 과자와 사탕을 진설했다.

장구와 징이 울렸다. 녹색 비단 옷을 입은 무당이 양손에 칼을 들고 나타났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몰렸다. 굿판이 구경꾼들로 둘러 싸였다. 경숙은 손을 모으고 상체를 숙이며 빌고 또 빌었다. 무당은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종류가 다른 칼을 번갈아 잡으며 옷자락을 펄럭였다. 작두가 등장했다. 구경꾼들의 사진 찍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찰칵거렸다. 언제 무당이 작두를 타지? 돈 많이 줄 때 타지. 사람들이 키득댔다. 금색 장군 모자를 쓴 무당이 작두 위로 올라갔다. 시커먼 칼날이 번득였다. 날의 몸통에 황금색 용이 선연히 새겨져 있었다. 작두 위의 무당은 전지전능해 보였다. 적어도 경숙에겐 그랬다. 무당은 칼을 휘두르며 겅중겅중 뛰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바람 속에서 펄펄 끓었다. 갑자기 무당이 맞지도 않는 어린아이의 한복에 양팔을 끼웠다. 그러자 엉덩이를 씰룩이며 양 팔을 모아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찔렀다. 짱구 춤이잖아. 구경꾼 중 누가 소리쳤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입을 모아 무당의 춤에 박자를 맞추었다. 울라 울라, 울라 울라. 기분이 좋으면 선호는 짱구를 따라 그렇게 춤을 추었다. 경숙 앞에 바지를 반 끌어내려 엉덩이를 드러내고는 부끄럼도 모르고 추던 춤이었다. 그것은 선호였다. 경숙은 이제 숫제 땅에 얼굴을 박고 빌었다. 선호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갑자기 뚝, 모든 게 멈추었다. 무당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고 징과 장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란스럽던 굿판에 거짓말처럼 정적이 흘렀다. 경숙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무당이 경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이 말했다. 그 애 죽었다, 여기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경숙은 무당의 입술이 지나치게 붉다고 생각했다. 무당의 붉은 입술이 선호를 삼켜버린 것 같았다. 아아아아아! 경숙은 작두를 밟고 무당에게로 뛰어갔다. 옆에 놓여있던 칼을 집어 들었다. 덮쳐오는 경숙의 무게에 무당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구경꾼들이 말렸다. 경숙은 있는 힘을 다해 무당을 붙잡았다. 무당이 입고 있던 어린아이 한복이 벗겨졌다. 경숙이 그 옷을 들고 망연자실하는 사이 무당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경숙은 꼬마 집으로 갔다. 사무실이 비었다는 것도, 새벽 한 시라는 사실도 잊었다. 벨을 눌렀다. 경철이 나왔다. 반드시 엄마를 데리고 오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아내고서야 꼬마는 침대에 누웠다. 경철은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경숙은 이불을 끌어 와 가슴까지 덮어주었다. 아이는 금세 잠에 빠졌다. 오늘은 꼬마 옆에 있겠다고, 경숙이 말했다. 저러다 다시 깨서 울기도 한다며, 경철도 그 방에 남았다. 경숙이 눈을 떴을 때 꼬마와 경철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잠든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일어서는 경숙의 손을 경철이 잡았다. 고마워요.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경숙은 천사호출에서 해고되었다. 대신 꼬마 집에 취직했다. 이모님이 관둬서 마침 사람을 찾던 중이라고, 경철이 말했다. 경숙은 일찍 출근해서 꼬마와 경철의 아침을 차렸다. 어느 순간부터 식탁에 같이 앉았다. 꼬마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왔으며, 낮에는 집안을 청소하고 필요한 장을 봤다. 퇴근하는 경철을 꼬마와 함께 기다렸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벽시계가 자정을 향해 가면 그제야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

당신 요즘 잘 자더라, 남편이 말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경숙을 안았다. 아이를 갖자, 아이가 생기면 훨씬 나아질 거야. 남편은 아이를 원했다. 그러나 경숙은 남편을 마주 보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다. 선호는 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선호의 얼굴을 한 남편을 껴안고 새로운 아이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무당이 선호의 죽음을 선언해버림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는 암묵적 동의가 형성되었다. 어쩌면 선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경숙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입 밖으로 뱉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씻김굿을 해주겠다는 무당의 전화를 받은 것은 남편이었다.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선호가 매일 밤 자신을 찾아와서 본인의 마음도 무겁다고 했다. 망자가 편히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은 수화기를 든 채 경숙을 보았다. 그날 이후 경숙은 정신이 나간 사람 아니, 정신이란 것이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남편은 무당이 앞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고 긴 천이 해변에서 바다로 깔렸다. 길고 긴 길이었다. 그 길 끝에는 작은 배가 있었다. 색색의 종이로 만든 연꽃이 장식된 배였다. 상여였다. 무당이 배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경숙은 인정할 수 없었다. 사기야, 반칙이야! 흰 길을 밟고 배를 향해 뛰었다. 남편이 말렸다. 맥없이 넘어졌다. 배는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경숙은 무릎으로 걸었다. 흰 천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바다로 난 길을 지워버렸다. 무당이 경숙을 노려보며 말했다. 곱게 보내지 않으면 망자도 심술을 부려! 무당의 입술이 지나치게 붉다고, 그 와중에도 경숙은 생각했다.

나가봐야 해. 경숙은 몸을 비틀어 남편의 품을 빠져 나왔다. 옷을 갈아입는 경숙의 등 뒤로 날카로운 남편의 시선이 꽂혔다.

급하게 출장을 가야 한다고 경철이 말했다. 꼬박 이틀이 걸릴 거라고 했다. 꼬마는 자신이 잘 보겠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경숙이 말했다. 하원하는 꼬마를 데리고 대형 마트 안에 있는 키즈 카페로 갔다. 꼬마는 놀이기구들 사이를 뛰어 다녔다. 금방 또래 친구를 사귀었다. 경숙은 아이가 언제든 마실 수 있게 음료숫값을 미리 지불하고 장을 보았다. 오늘 못 들어간다는 전화를 남편에게 거는 중 우연히 예전 이모님을 만났다. 수다가 길어졌다. 꽤 오래 마트를 돌아다니다 왔음에도 꼬마는 노는데 열중이었다. 경숙이 돌아온 지도 모르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을 꽉 채우고서야 아쉬운 듯 카페를 나왔다. 같이 놀던 친구에게 또 만나 놀자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꼬마를 씻기고 밥을 먹이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숙제를 하다 잠든 아이를 침대로 옮겼다. 경숙도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휴대폰에는 남편이 걸어 온 전화가 수십 통이었다. 그제야 경숙은 남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꼬마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경숙은 서둘러 집으로 갔다. 남편은 자고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어 하루 푹 쉴 참이라고 했다.



경숙이 꼬마 집 현관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렸다. 강북 경찰서입니다. 경찰서, 란 말에 경숙은 퍼뜩 선호를 떠올렸다. 그러나 형사는 윤경철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는 이름이라고 여겼다가, 꼬마의 아빠라는 것이 생각났다. 경철은 출장이 끝나는 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을 끝낸 경숙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그를 기다렸다. 전화기의 전원은 꺼져 있었다. 꼬마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경숙은 새벽에 잠깐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었다. 감기라던 남편은 어쩐 일인지 그곳에 없었다. 혼자 있을 아이 걱정에 경숙은 서둘러 꼬마에게로 갔다.

병원으로 뛰었다. 경철을 본 경숙은 꼬마의 양 볼을 감싸 고개를 돌렸다. 경철의 모습이 너무 처참했다. 이건 뭐 죽일라고 작정한 거라. 배가 불룩하게 나온 형사가 말했다. 사고소식을 전하던 전화기와 같은 목소리였다. 머리 한쪽이 거의 뭉개졌고 눈알이 튀어나와 있었다.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의식 따윈 있을 리가 없었다. 형사는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친구…, 경숙은 말끝을 흐렸다. 친구라, 형사는 경숙의 말을 따라하며 아래위로 그녀를 훑었다. 그의 다크서클이 내려갔다 올라왔다. 남자들은 경숙을 보면 대개 경계를 풀었다. 아니, 친절해졌다. 급히 나오느라 대충 틀어 올린 경숙의 숱 많은 검은 머리는 흰 피부 붉은 입술과 조화를 이뤘다. 마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청순하게까지 보였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했어요. 배 나온 형사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다. 경숙의 신원을 확인하고 남편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었다. 의아해하자,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거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경찰이 조금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이런 경우 남편은 중요한 용의자 중에 한 명이죠. 경숙은 형사가 말하는 이런 경우, 에 대해 생각했다. 미리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형사는 경숙의 어깨를 여러 번 두드렸다.

얘가 그 꼬마구나. 안녕, 꼬마야. 남편은 꼬마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 아이 아빠가 많이 다쳤다는 것과 그래서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남편이 꼬마와 같이 농구를 하러 나가겠다고 했다. 경숙은 옷장에서 편한 옷을 찾았다. 남편이 즐겨 입는 캐주얼한 등산복이 보이지 않았다. 버렸어. 남편은 못에 걸려 옷이 찢어졌다고 했다. 즐겨 신던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사람인데 별일이라고 경숙은 생각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꼬마도 예상을 넘는 적응력을 보였다. 물론 처음엔 약간 어색해했다. 하지만 워낙 붙임성이 좋았고, 늘 바빴던 아빠와는 달리 경숙의 남편은 아이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꼬마는 선호의 책상에서 숙제를 하고, 선호의 잠옷을 입고 선호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남편은 꼬마에게 야구와 축구를 가르쳤고, 경숙의 눈을 피해 온라인 게임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범인이 잡혔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사실 내가 이 말을 해 줄 의무까지는 없는데, 입술을 바르르 떨던 경숙 씨 얼굴이 남아서 말이야. 경숙은 남자의 다크서클을 떠올렸다. 대리기사라고 했다. 경철이 거래처에서 수금한 돈과 그의 명품 시계가 그날 경철이 부른 대리기사의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본인은 자기가 폭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특수강도전과 5범인 대리기사가 범인이 아닐 확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폭행의 정도가 너무 잔인한 것이 조금 걸리지만 워낙 그런 놈이라고 말했다. 그것 말고도 해결해야 할 사건은 차고 넘치니까, 범인이 잡혔으니 수사를 종결한다고 덧붙이며 형사는 전화를 끊었다.



경철은 식물인간 상태로 차도가 없었다. 꼬마가 경숙의 집에 온 지도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꼬마를 입양하자는 말은 남편이 먼저 꺼냈다. 엄마는 죽고 아빠의 상태가 저러니 알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다. 경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그들은 꼬마를 선호라고 불렀다. 그들이 꼬마에게 선호야, 하고 부르면 어느 순간부터 꼬마가 네, 하고 대답했다.

남편과 꼬마와 경숙이 처음으로 함께 경철의 면회를 갔다. 경숙은 꼬마를 데리고 가끔 병원을 가긴 했지만 남편과 간 적은 없었다. 8층 병동 입구 데스크에는 간호사 둘이 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경숙이 익숙하게 음료수 한 통을 올려놓았다. 경숙을 알아 본 간호사 한 명이 눈인사를 했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경철의 입원실로 걸어가는 경숙의 무리를 가리키며 한 간호사가 말했다. 저 남자는 뭐야? 식물인간 아저씨가 남편 아니었어? 아니야, 김 선생. 저 꼬마도 아들 아냐. 그 집에서 일해 주는 아줌만데 사고이후 엄마 없는 꼬마와 아빠를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거야. 천사가 따로 없네. 다른 간호사가 맞장구를 쳤다. 그지? 날개만 없지, 완전 천사야.

경숙이 경철 옆으로 꼬마를 밀자 아이는 마지못해 아빠 곁에 섰다. 사고가 난 날 병원에서 경철을 본 것이 큰 충격이었는지 꼬마는 아빠를 무서워했다. 경숙은 남편에게도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도 마지못해 쭈뼛쭈뼛 다가왔다. 멀뚱하게 허공을 향하여 눈을 껌뻑이는 경철에게 남편이 말했다. 이제 아무 걱정 마세요, 아이는 우리가 잘 키울게요. 그때였다. 경철의 초점 없던 눈동자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인 것은. 꼬마는 얼른 나가자며 남편에게 매달렸다. 면회가 끝나면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에 아이는 들떠 있었다. 우리 먼저 나가 있을게, 당신도 나와. 남편이 병실 문을 향해 걸어 갈 때 경철은 손가락을 까닥이기까지 했다. 경숙은 혼자 병실에 남았다.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이윽고 경숙은 조용히 일어섰다. 손을 뻗어 경철의 산소 호흡기를 떼었다. 경철의 사지가 꿈틀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경숙은 떼었던 산소 호흡기를 다시 그에게 달았다. 그러고 나서 경철의 침대를 비상호출 버튼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경숙은 병원 복도로 나왔다. 천천히 걸었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놀이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숙은 말했다. 이제 엄마라고 불러. 지금부터 내가 너의 엄마야. 꼬마가 남편의 목말을 타고 있어 고개를 한껏 위로 치켜 올려야 했다. 꼬마의 대답이 잘 들리지 않았다. 남편이 아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아줌마가 바로 천사였다고요. 우리 아빠가 그랬잖아요. 저의 엄마는 천사라고.

그 밤, 선호가 죽고 처음으로 경숙은 남편과 사랑을 나눴다. 이제 선호는 남편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혼곤하고 저릿한 절정이었다. 잠든 남편을 두고 경숙은 마당으로 나왔다. 구석진 담벼락 아래를 손으로 팠다. 검은 비닐봉지가 드러났다. 준비해간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며 타닥타닥, 등산복의 소매가 타들어 갔다. 멀리서 길 잃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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