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다. 불평등한 신분 질서가 강하게 뿌리내렸던 조선 사회에서 동학은 무엇보다도 평등을 중시했다. 양반과 상놈,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평등이 중요했다. 모든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평등사상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 |  |
| 지난달 25일 충남 예산군 관작리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열린 ‘내포동학문화제’. |
또 다른 핵심 가치는 자주(自主) 의식이다. 서양과 일본에 대한 자주 의식을 특히 강조했다. 나라 사이의 자주 의식은 곧 외세에 대한 평등이기도 했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은 척왜양(斥倭洋, 왜놈들과 서양세력을 몰아내자는 뜻) 깃발을 내걸었다.
123년 전 봄, 동학혁명이 터지자 동학군을 이길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중국(청) 군대를 불러들였고 덩달아 왜군도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반도는 청일전쟁으로 몸살을 앓았고 중국을 이긴 왜군은 조선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해 가을, 추수를 끝낸 동학군은 왜군의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죽창 들고 일어났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선 군대는 왜군의 지휘를 받으며 동학군을 진압했고, 왜군은 조선의 백성을 학살했다. 제노사이드, 인종 말살이나 다름없었다.
신분 차별 철폐 등 평등을 요구하는 동학군에 우호적이던 유림 선비 세력은 극소수였다.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던 임금과 조선 정부는 왜군의 괴뢰(허수아비)였다. 왜군 즉 외국 군대의 침략에 항거하여 동학군은 외롭게 싸워야 했다. 동학혁명의 좌절 그리고 10여 년 후 조선 왕조는 멸망했다. 유림 선비들은 망국을 한탄하며 자결하거나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때늦은 일이었다.
초겨울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공주 우금치에서, 하동 고성산에서, 당진 승전목에서, 완주 삼례에서, 예산 관작리에서, 전남 무안에서 동학혁명기념식이 열렸다. 승전목과 관작리는 승전기념식이고 다른 곳은 순국한 동학군을 기리는 위령식이었다. 충남 예산 관작리 전투에서 동학군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나? 민중의 단결된 힘이 관작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동학혁명 당시 여성도 다수 참여했다. 관작리 전투에서는 관군의 밥을 해주던 노파가 농민군에 내응하여 관군이 잠든 사이에 포신에 물을 붓고 도망했다. 관군은 대포를 쓸 수 없었다. ‘동학군은 비바람을 부르고 신비한 술수가 있어 능히 대포 구멍에 물이 나게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동학군이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난 이면에는 이름 없는 여성들의 헌신이 있었다.
지난달 25일 충남 예산군 관작리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열린 관작리 전투 승리 기념 ‘내포동학문화제’에서 초등학생들이 동학군을 재현했다. 박성묵 예산 동학혁명기념사업회장은 123년 전 겪었던 시련과 망국의 과정이 지금과 너무나 비슷하다며 말했다. “칼바람 부는 추운 날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또 우리가 잘못하여 123년 전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꼴을 어린 학생들에게 물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