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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문화현장 <37> 미학자 이성희와 함께본 치바이스(薺白石) 전

비움으로서 꽉 채워진 그림…소박한 붓질이 더 진한 울림으로

  •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  |   입력 : 2017-11-16 19:36:58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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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장서 화가된 ‘인민예술가’
- 초기작 유명화가 화풍 베껴
- 기교 화려하지만 특별함 없어
- 중기부터 단순화로 되레 강렬
- 60세 넘어서야 예술인생 정점

- 50년 무명의 포기않는 끈기
- 채소·풀 등 평범한 삶의 기운들
- 격동기 중국 고단한 마음 달래

부산에 ‘중국 화단의 피카소’가 와 있다. 부산 남구 부산박물관 기획전시실에 ‘모신’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다. 부산박물관이 앞서 서울에서 큰 화제를 모은 ‘치바이스(齊白石)-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 전(본지 지난 7일 자 22면 보도)을 새롭게 기획해 다음 달 10일까지 선보인다.

■‘특별함’ 없던 초기 작품

이성희 미학자가 지난 12일 부산 남구 부산박물관 ‘치바이스’ 전에 전시된 작품 ‘서락도책’을 설명하고 있다. 간결한 필획으로 쥐와 호박, 당근 등을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김종진기자 kjj1761@kookje.co.kr
중국화의 세계와 치바이스의 작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이성희 미학자와 함께 지난 12일 부산박물관 치바이스 전을 관람했다. 이성희 미학자는 시인이며, 장자 철학을 심미적 관점에서 연구한 미학자이다. 고교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꼭 한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중국 회화 명품 30선’ ‘동양 명화 감상’등 저서를 펴냈다.

이날 전시장은 어르신부터 아이를 데려온 젊은 부부, 외국인까지 중국 대화가를 보러 모인 관람객으로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치바이스 초기 여인상과 산수화를 보고 이성희 미학자가 말했다. “초기 작품엔 ‘특별함’이 보이지 않아요. 자기 붓이 아직 안 나왔어요. 치바이스는 팔대산인, 서위, 석도, 양주팔괴, 오창석 등 중국 대화가의 그림을 베끼며 실렸을 쌓았죠. 자신의 소박한 삶이 작품이 투영되면서 만년에야 꽃을 피웠습니다.”

치바이스는 중국 후난성 샹탄(상담)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춘즈(純芝). 태어날 때 집안에는 논 한 마지기밖에 없었다. 8살 때 외조부의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웠으나 9살 되던 해에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나무꾼, 목동이 됐다. 15세 때 목공 기술을 익혀 19세 때는 솜씨 좋은 목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20세 때 우연히 ‘개자원화보’(중국화의 기본적인 이념이나 묘사 방법을 예시한 입문서)를 접한 뒤 화보 속 그림을 수시로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27세 때 목장에서 화가로 완전히 전업했다.

치바이스는 50대 중반 북경으로 이주한 뒤 독특한 화풍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성희 미학자는 이번 전시에 나온 초기와 중기 ‘이철괴’ 그림으로 그 차이를 설명했다. 이철괴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선으로 늙은 거지가 철괴(쇠지팡이)를 짚고 호리병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초기 작품은 굉장히 기교를 많이 부렸어요. 선에 굴곡과 변화를 많이 줬죠. 중기 작품은 선이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주는 인상과 힘은 훨씬 강렬해요. 초기 그림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공필(工筆)로 대상을 자세히 묘사하는 대신 형태를 매우 간략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성희 미학자는 “거의 60년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 화가로 살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끈기가 치바이스의 미덕 ”이라고 설명했다.

■채소 같은 소박함…대기만성

이철괴를 그린 초기 작품(왼쪽)과 중기 작품. 중기로 갈수록 선이 단순, 소박하지만 강한 힘이 느껴진다. 부산박물관 제공
60대 중반부터 1957년 9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이 치바이스 예술 세계의 정점이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 대다수는 이 시기에 창작됐다. 대상을 더욱 단순화하고, 수묵 기법을 파격적으로 구사하고, 먹색과 붉은색(혹은 노란색)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전서와 예서에 바탕을 둔 서예적 필치를 그림에 적용해 조형 감각을 불어넣었다.

특히 평범한 소재를 비범한 경지로 끌어올린 독창적 화법이 이 시기 빛을 발한다. 채소와 풀 같은 소박한 기운을 뜻하는 ‘소순기’(蔬荀氣)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50여 년 무명 화가로 살았던 치바이스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였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풍기는 기운을 서권기(書卷氣)라 합니다. 치바이스가 따라 그린 중국 대화가들은 서권기가 강렬하죠. 그에 상응하는 기운이 ‘소순기’입니다. 소순기는 체험에서 우러나오기에 아무나 가질 수 없죠. 치바이스는 서권기를 소화하면서, 삶의 밑바탕에서 나온 소순기를 결합했기에 누구도 가지 못한 뛰어난 경지인 ‘일품(逸品)’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 ‘소순기’가 느껴지는 그림이 많이 있다. ‘오이넝쿨과 청개구리’(1930~1957), ‘병아리와 풀벌레’(1940), 쥐를 그린 ‘서락도책’(1948), 배추와 당근을 그린 ‘채소와 풀벌레’(1948), ‘비파나무와 잠자리’(1948)이다. ‘고고한’ 문인화가들은 쳐다보지도 않던 대상이다. 이성희 미학자 말대로 “붓도 몇 번 대지 않은 것 같은데”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새우 8마리를 그린 작품(1948) 앞에 관객의 발길이 자주 멈춘다. 최소한의 붓질로 역동적인 운동감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성두당 연못가에서 다리를 씻으려는데 갑자기 무엇인가 가위로 마구 물어뜯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황급히 물 밖으로 다리를 빼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우란 놈이 우리 아들을 우습게 봤구나’ 하고 웃으신다.” 전시장 한 편에 새우에 얽힌 치바이스의 어린 시절이 소개돼 있다. 새우는 그에게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였다. 추억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소박하고 생생한 새우를 그릴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치바이스

치바이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중국 사회는 대변혁기였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고(1905), 국민당 정부가 서고(1927), 중일전쟁이 터지고(1937),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1949).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 자유민주와 공산사회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이성희 미학자는 “치바이스는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격동기 중국 민중의 고단한 마음을 치바이스의 작품이 다독여준 것 같다”고 말했다. 치바이스는 1953년 생일을 맞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치바이스는 한국 화단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45년 해방 이후 김영기 김기창 장우성 등 한국화가들이 일본풍을 청산하고 한국의 수묵화 전통을 복구하는 동시에 한국화의 현대화를 구현하는 ‘신문인화’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때 치바이스의 그림을 참고했다. 이성희 미학자는 “우리 전통 그림은 기존 중국화에 비해 소박하다. 그래서 소박한 치바이스의 작품을 친숙하게 느끼는 것 같다. 화려한 중국의 산수화가 전시됐다면 이처럼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학자 이성희=부산대 철학과 졸업. 1989년 ‘문예중앙’으로 시인 등단. 부산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저서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동양명화감상’ ‘미학으로 동아시아를 읽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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