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표 100인 선정 큰 영광
- ‘진짜 시조’에 대한 부담감도

- 엄격한 율격 지닌 정제된 형식
- 세상 꿰뚫는 통찰력 갖게 해
- 공감 가는 쉬운 시 쓰고 싶어

스무하루 달빛은 고즈넉한 의자다/맑고도 고운 선율/자르르 펼쳐놓고/여리고 고단한 것들 쉬어 가라 몸 낮추는(손증호 ‘달빛의자’)

현대시조 100인선에 포함된 시조시인 6명이 9일 오후 부산 연제동 거제동 한 카페에 모여 자신의 시집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 손증호 우아지 제만자 김덕남 이말라 시인. 김소해 시인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이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초장 중장 종장의 운율을 딱딱 맞추지 못한다면 당신의 몸 안에는 시조 DNA가 없다는 얘긴데, 한국인으로서는 희귀한 케이스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최근 완간된 현대시조 100인선(고요아침 출판사) 2차분(50명)에 포함된 부산 시조시인 7명 중 6명이 지난 9일 오후 어느 카페에 모여 그 ‘DNA’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소감을 듣고자 마련한 자리였지만, 어쩌다 보니 시조의 매력에 관한 긴 수다가 됐다.

기다리는 버스가 오나 검색버튼을 누르다/막 지나간 차 한 대에 여운을 담지 않는 건/내 굼뜬 세상의 바퀴로 갈 곳이 있기 때문(제만자 ‘기점’ 중)

■소감: 대표 시조시인 100인이라니!

시인들은 “한국에 시조시인이 얼마나 많은데 큰 영광”이라고 기쁨을 표했지만 “다른 시인보다 우월하다는 뜻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고 사양했다. “오히려 평생 쓴 시조 가운데 고르고 골라 선집을 발간했다는 개인적인 의미가 더 크다”는 누군가의 말에 손증호 시인이 “바람에 마구 날리는 머리를 한 번 쓱 빗은 것”이라고 시인다운 설명을 붙였다. 김덕남 시인은 “이제 진짜 시조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고 했다.

시절에 맞는 배역 다하고 저무는 길 피난살이 상처 싸맨 영도다리 바로 아래/낙오병 반바지 같은/점집 두 곳 남았다(우아지 ‘점바치 골목’ 중)

■왜 시조인가

“고향이 안동인데 할머니가 늘 고전을 읽어주셨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고 고시조에 반했다”고 말한 김정 시인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시조였던” 사람은 없었다. 자유시로 등단한 경우라도 그 매력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조만 쓰게 됐고 심지어 예전에 쓴 자유시를 시조로 바꾸는 작업도 한다. 이말라 시인은 “좋은 시는 대개 시조의 율격을 지녔다”며 “말이 많아서 피곤한 시대, 줄이고 다듬다 보니 시조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고 했다.

“엄마, 여기 추워/나 집에 가고 싶어”/물속에서 썼음직한 또렷한 문자 한 줄(김정 ‘문자 실루엣’ 중)

■쉬운 시조 : 문학의 로망

좋은 시조가 무엇이라고 감히 정의하는 시인은 없지만, 6명 모두 ‘쉬운 시조’에 대한 갈망을 말했다. ‘문자 실루엣’을 바로 그런 갈망으로 썼다는 김정 시인은 “세월호는 모두 아니까, 쉬운 글로 공감하고 싶었다”고 했다. 제만자 시인은 “쉬운 시가 가장 좋은 시인데 쉽게 잘 쓰는 거야말로 어렵다”며 “쉽게 줄줄 쓰고나서 읽어보면 그저 푸념일 때가 많다”고 했다. 한 시인은 “어려운 작품이 상을 많이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만인을 위한 시조 한 편 쓸 수 있다면…” 하고 끝말을 아꼈다.

어디에 신은 계신지 알지도 못하지만/아들의 가는 길에 한 그릇 찬물이나마/밝히어/부탁할 수 있다면/빌고 또 빌 뿐입니다(김소해 ‘하늘빗장’ 중)

얼음을 구운 듯 눈물이 났다/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임을/죽음도 눈부시단 걸 울면서 알았다(이말라 ‘얼음을 굽다’ 중)

■치유:침착함이 상처를 달래나

정제된 글로 분노·원망을 직접 토해내긴 어렵겠지만 들끓는 마음을 삭일 시간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시인들은 되물었다. 글을 깎아내다 보면 과잉된 분노와 슬픔도 함께 깎일 것이다. “카타르시스가 생기기도 한다”고도 했다. 한 시인은 “마음이 굳어버릴 때 시조가 그 굳은 마음 사이에 틈을 벌려준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학의 힘이리라.

향기 푼 낮달이 살짝 걷은 구름자락/까무룩 몸을 떠는 나비의 날갯짓에/농익은 꽃잎 하나가/토옥!하고 떨어진다(김덕남 ‘봄 탓이로다’ 중)

■변화:시조가 자신을 바꿨나

맞다, 맞다 정말 바뀌었다며 서로의 얼굴을 찾아 공감하는 시인들. “단정해지는 걸 느낀다” “율격 속에서 나를 이기는 법을 배웠다” “세상의 부조리를 정제된 형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통찰력이 생기는 것 같다”고 각자의 변화를 말하던 시인들은 “노는 것도 막 놀지 않고 품위 있게 놀게 됐다”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