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다 건축가를, 건축가보다 건축을 먼저 만났습니다. 몇 해 전 한겨울, 명상 수련을 위해 찾은 공주 마곡사에서였습니다. 사찰 옆으로 흐르는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 십여 분 걸어 들어가자 무채색의 단순하고 소박한 외관의, 전통 불교 문화원이 산 아래 낮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짙은 갈색의 큰 지붕은 마치 겨울의 보호색처럼 눈 내리는 산, 눈 덮인 대지 위에 이물감 없이 섞여 동안거에 든 가난한 스님의 승복 빛깔과도 같았습니다. 이후 그 건물을 설계한 이가 승효상 건축가라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관심은 팬심으로 이어져 그의 여러 저서까지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
| 승효상 건축가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의 개인 저택으로 설계한 ‘수졸당’ 스케치. 느린걸음 제공 |
빈자의 미학은 승효상의 여러 저서 중 그의 건축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는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 책 서두의 그의 글대로, 그의 건축은 침묵과 무용(無用)에 철저합니다. 우리네 옛 ‘마당’의 쓸모없음이 단일 목적이 아닌 다목적의 열린 공간으로의 무용(無用)임을 그의 현대 건축에서 쉽게 발견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승효상은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 빈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15년간 김수근의 공간연구소에서 일합니다. 스승의 타계 후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연 그는 대표작인 수졸당, 당진 돌마루 공소, 노무현 대통령 묘역 등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며 한국 현대 건축을 이끕니다. 도시 주택 한가운데 마당과 담장을 담은 대담한 설계로 알려진 ‘수졸당’은 친구인 유홍준(‘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저자)의 개인 주택으로, 승효상이 설계비 대신 건축사무소의 이름이 된 ‘이로재’ 현판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이 책을 건축 책이 아닌 ‘삶의 혁명’을 위한 선언이라고 극찬한 시인 박노해는 독방에서 책을 거듭 읽으며 묵상에 잠겼노라고 고백합니다. 건축이 지니는 가치 이념이 인간 삶에도 거의 그대로 대응되기 때문이겠지요. 승효상은 건축적 요건의 세 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합목적성, 그 건축이 놓이는 땅에 대한 장소성, 그 건축이 배경으로 하는 시대성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체적 삶에 근거를 둔다.’ 그렇기에 그는 고도성장의 베일 아래 획일화되고 박제된 이 도시와 건축의 상실된 정체성을 시대의 위기이며 미래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원래 이 책은 1996년 초간된 책으로, 승효상이 외국 대학의 강연을 앞두고 그동안 쓴 에세이와 강의 노트를 정리하여 최소 부수로 발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물에 관심있는 이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필독서가 되면서 복간 요청이 이어졌고, 결국 지난해 20주년 개정판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의 말미에서 동료 건축가 민현식은 승효상이 지닌 빈자의 미학에 대해 이렇게 밝힙니다. “그의 빈자의 미학은 물리적으로 빈한한 자의 어쩌지 못하는 퇴행적 미학이라기보다 스스로 빈자이고자 하는 자의 실천적 미학입니다.” 이에 승효상은 후기에서 이 책이 채찍과 필터가 되어 오래도록 자신의 건축적 실천의 지침이 되었음을 고백하며, 독자들이 그 안에 담긴 본질만을 부디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아파트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아파트는 기능적 건축의 결정판입니다. 그런 고층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기능이 주는 막대한 편함이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극도의 기능적 건축은 삶을 피폐화시키고 인간을 왜소하게, 자폐적으로 만든다는 건축가 승효상의 경고에 문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좋은 건축에서 좋은 삶이 자라니까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