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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짧은 시구들, 그 속에 긴 사색의 여운 /박진명

순간의 꽃 - 고은 지음/문학동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9-29 19:38:56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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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도, 말도 넘쳐나는 세상이다. 넘쳐나는 속에서 경쟁하듯 메시지를 쏟아내다 보면 자극적이고, 중언부언하고, 겉돈다. 그럴듯하고 화려하지만 실속 없이 겉도는 욕망만 남는다. 순간순간의 수많은 관계, 일과 미션이 펼쳐지지만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고 건너뛰다 보면 그 빈틈에 내 것 아닌 욕망의 말과 이미지들이 들어선다. 풍요롭다 못해 휘황찬란해 보이지만 내 것 아닌 것들로 가득한 허탈한 삶의 풍경이다.
   
이렇게 파편적인 이미지와 자극적인 말로 채워진 일상에 화들짝 놀랄 때마다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나간 일, 덜 이익이 되는 일, 남의 일, 작은 일에도 오래 시선이 머물러 언어를 길어 올리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그렇게 길어 올린 시를 읽다 보면 아직도 매듭짓지 못한 나의 지난 시간, 이해관계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가치나 정신 같은 것, 나와의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 타인을, 놓치고 있었던 소박함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이라고 해서, 시라고 해서 모두 그런 것은 또 아니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비유나 재미난 발상, 강렬한 이미지들, 횡설수설로 도시적 감각과 정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명확한 무언가를 단정하기 힘든 복잡한 현대의 삶을 아방가르드한 음악이나 추상회화처럼 표현한 시들도 많다. 내가 지니지 않은 도시적 감성을 마냥 동경하던 젊은 시절에는 그런 시들이 더 그럴싸하고 멋있어 보여 흉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시들은 타인의 욕망으로 가득 찬 유행 같은 것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반세기가 넘는 6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150권 이상의 저서를 남긴 고은 시인의 시를 시집으로 만난 것은 불과 몇 해 전이다. 순간의 꽃은 짧지만 여운이 긴 시들을 모아놓은 시집이다. 따로 제목이 없는 작은 시편들이 이어지는데, 그 내용이 삶의 깨달음을 담은 선시 같기도 하고 형식적으로는 짧고 간결하여 일본의 하이쿠 같기도 하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

“이런 날이 있었다/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소나무 가지 하나/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찾던 길이었다”

“강 건너 불빛//아무도 묻지 않았다/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두서없던 난잡한(?) 생활 속에서 처음 이 시집을 접했을 때는 짧고 간결한 언어가 어색했다. 객기를 좇던 젊은 날엔 이런 시가 늙음에나 어울리는 달관의 시라며 비아냥거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짧은 시의 행간을 찬찬히 읽어가다 보니 그간 접해온 세간의 언어들이 지나치게 번잡했던 것은 아닌지, 타인의 욕망이 서린 언어에 휩싸여 삶의 순간들을 그저 흘려보내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시가 지닌 직관의 힘은 꽃을 바라보는 ‘눈 깜짝할 사이의 그 순간’을 통해서 다시 이 세계를 오래 응시하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이 순간의 꽃에 시인의 시선이 머물렀던 이유가 아닐까. 수많은 말과 관계들 속에서 오히려 삶이 더 흐리멍덩해지는 어느 날, 티끌처럼 별 것 아닐지도 모를 ‘순간’에 오래 머무르는 담담한 시구와 행간을 읽다 보면 일상의 군더더기가 후드득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노를 젓다가/노를 놓쳐버렸다//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문화기획자·청년정책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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