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일 때 집은 그리 크지 않아 형님과 나는 한방을 썼다. 형제 중 공부에 취미가 덜 했던 하나가 잠을 못 이겨 로그아웃. 혼자 남은 형이 한창 제곱근을 풀던 그 때였다. 다음 날 형은 이날 경험을 “조용하던 방에 갑자기 책상 위 볼펜 하나가 툭 떨어지더라”고 묘사했다. 볼펜은 형 책상에서는 팔 두 개를 이어 붙여 뻗어도 닿지 않을 내 책상 위에 있었다. 그 때 만유인력의 법칙이 떠올랐으면 형은 뉴턴이 되었을까. 하지만 순간 그는 x^+y^ =(x-y)^+2xy =2+2=4 대신 다른 법칙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데 무언가 떨어지면 귀신 짓이다.’ 형은 자기 손에 쥔 볼펜만큼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주먹을 꽉 쥔 뒤 한참을 있다 용기를 냈다.

“장난치지 마라.”

짓궂은 동생이 한 장난이길. 형은 내심 아무 반응도 없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뒷골이 서늘해지더니 내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뭐라 하노.”

한기를 느낀 형은 그 즉시 안방 문전으로 쇄도했는데, 분명 목소리였던 나는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더랬다. 뉴턴이 되지 못한 형은 밤새 뒤척였다.

그 날 이후 나는 형과 같이 방에 있다가 조용하다 싶을 때마다 볼펜을 떨어뜨렸다. 형이 한 두 번 반응할 때마다 나는 좋아 죽었지만 형도 더는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목소리’만큼은 10대 형제 불가사의로 남았다. 그 때 형제가 10대였다.

C#1. 공포영화와 ‘목소리’

영화 <장산범>을 만들어 개봉을 앞둔 허정 감독도 ‘목소리’에 연출 포인트를 두었다. 장르를 막론하고 사운드는 중요하지만, 특히 공포 영화는 음소거 하고 보면 하나도 안 무섭다 할 만큼 ‘소리’가 중요하다. 영화 <여고괴담>에서 귀신이 삼단 뛰기로 관객 앞에 오는 장면을 소리 없이 보면 그냥 귀신 육상 경기 비슷하다. 허정 감독은 코멘터리 예고편에서 이렇게 연출 배경을 설명한다.

영화 ‘장산범’ 허정 감독 코멘터리 영상 캡처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를 따라갔는데 예상과 실체가 다르다는 공포에 끌렸다.” 

메인 예고편 속 인물들은 계속 한 아이가 내는 목소리에 홀린다. 그 목소리는 때로 자식을 닮기도, 어머니를 닮기도 한다. 영화를 풀어가는 중요한 실타래는 ‘모션 포스터’라 불리는 예고영상 속 유일한 대사 한 줄이다. 어두운 골목, 부모일 것 같은 남녀에게 한 손씩 내준 채 걸어가는 아이. 문득 뒤돌아보며 아이가 말한다. 

“엄마, 뒤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

내가 아닌 내 목소리에 홀린 형은 밤새 뒤척이고 말았지만, 엄마 아닌 엄마 소리에 홀린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 엄마가 아닌 실체는 누굴까. <장산범>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예고편에서 무속인은 그 실체가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낸다”고 했으니, 실체는 아마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짐작한다.

C#2. 모션 포스터

모션 포스터는 수많은 예고편 영상들 중 하나다. 영화를 홍보할 목적으로 극중 공간을 배경으로 짧게 찍은 영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모션 포스터 마지막 프레임을 캡처하면 그대로 영화 포스터가 된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흔히 접하게 되는 영화 포스터 속 인물이 그 속에서 잠시 연기를 하는 영상이라 보면 쉽다. 길이가 짧아 메인 예고편, 제작기 영상 등과 달리 서사나 정보가 거의 없다. 영화를 지배하는 분위기 전달이 목적이다. 그래서 같은 영화 다른 예고편에 비해 조회수가 낮은 편이다. 영상 속에 이야기가 없어 흥미가 떨어져 반복 재생률이 낮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빨간 상자 안에 번호판이 흐릿하다. 영화 ‘장산범’ 모션 포스터 캡처

<장산범> 홍보팀도 23초 길이로 모션 포스터를 제작해 공개했다. 뭔가 찾아낼 수 있을까 한참 돌려보지만 대사도 앞서 언급한 한 줄 뿐. 다만 옆에 주차된 차량 번호판으로부터 모션 포스터를 제작한 시점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티 나지 않게 번호판을 모자이크했다. 영화 속 차량들이 번호판을 가리고 달리는 모습을 본 적 있나. 영화 <택시운전사> 속 택시 번호판은 하도 많이 봐서 ‘0310’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일이라 기억하기도 쉽다.

요컨대 제작진이 직접 마련한 차량이라면 번호판을 굳이 가릴 이유가 없다. 제작진은 아마 영화 촬영이 다 끝난 후 모션 포스터 촬영을 위해 골목 하나를 급하게 찾았을 것 같다. 아니면 스태프 개인 차량이거나.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은 엄연한 개인정보다. 촬영 뒤 모자이크는 불가피하다.

C#3. <장산범> 슬레이터는 영화학과 신입생일까

슬레이트는 영화를 상징하는 쉬운 도구지만 광고나 예능에 종종 나와 일반에게도 제법 익숙하다. 하지만 더러는 슬레이트 치는 목적을 요식 행위 쯤으로 알기도 한다.

슬레이트는 씬(Scene), 컷(Cut), 테이크(Take) 번호 등 촬영 정보를 써 둔 플라스틱, 판자 등을 가리킨다. 위엔 못으로 연결된 짧은 막대가 자석으로 붙어있다. 슬레이터, 즉 슬레이트를 치는 사람은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 편집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이를 카메라 앞에 갖다 댄다. 이제 몇 번째 컷이 NG이고 OK인지만 써두면 녹화한 영상을 일일이 돌려보지 않아도 이들 컷들을 따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슬레이트를 세게 치는 사람은 보통 스무 살 새내기로 들어온 파릇파릇한 영화학과 학생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특히 첫 테이크를 촬영할 때 혼자서 ‘파이팅하자’ ‘우리 영화 대박’ 같은 의미를 담아 슬레이트를 힘차게 치기도 하지만, 그랬다간 감독이랑 진짜로 파이팅(fighting)해야 할지도 모른다. 깜짝 놀란 배우만 다시 감정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건 편집할 때 화면과 사운드가 일치하는 지점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종종 방송에서는 슬레이트 대신 박수를 치기도 한다.

슬레이터가 슬레이트를 거꾸로 들고 있다. 영화 ‘장산범’ 미스터리 열연영상 캡처

그런데 <장산범> 스태프는 심지어 슬레이트를 거꾸로 들고 있다. 슬레이트를 통해 작년 10월 25일 촬영한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영화과 대학교 1학년이가? 아니면 26일이 계약 만료가? 그런 것 같지만 그는 사실 잔뼈가 굵은 고수다. 거꾸로 든 슬레이트는 현장에선 이른 바 ‘엔드 슬레이트(End Slate)’라 부른다. 보통은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 슬레이트를 치지만, 초점이나 공간, 배우 감정 등 다양한 이유로 부득이 나중에 슬레이트를 친다는 뜻이다. 이미지를 보면 78씬 ‘1A‘ 컷은 아역 배우 신린아가 감정 소모를 많이 하는 장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테이크인 걸 보니 NG도 벌써 한 번 났다. 슬레이트를 아무리 살살 쳐도 조심스러우니 연기가 다 끝난 후 엔드 슬레이트를 친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장산범>은 동명 웹툰이 있다. 아직 해당 웹툰을 보지 못했지만, 이미 결과가 나온 셈이니 흥행은 별 수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예고편을 보고 댓글을 단 일부 영화 팬들이 ‘웹툰과 달라 보인다’고 한다. 이러니 또 안 볼 수 없게 됐다. 여름 끝물에, 실로 장산에 사는 호랑이(범)만큼 진귀한 국산 공포영화. 17일 개봉.

INSERT CUT. [개봉영화 예고편.txt]은…

수년 전부터 영화 예고편은 단순히 영화를 보고 싶도록 만든 영상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상용화 등 기술 발달이 기점이라는 분석이지만 영화 시장이 커지면서 생긴 다양한 수요자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도 보인다. 형태는 제각각이다. 코멘터리 예고편, 메인 예고편, 티저 예고편, 런칭 예고편, 캐릭터 예고편, 1차 메이킹 예고편, 2차 메인 예고편, 30초 예고편……. 크게 다를 것 없는 내용 속에서도 조금씩은 차이를 두고 있다. 그래서 예고편만 쭉 봐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꽤 많다. 국제신문 디지털뉴스팀에서는 공식 SNS, 홈페이지를 통해 매주 1회 개봉예정작 예고편을 꼼꼼히 살핀 글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신동욱 기자 inew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