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는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연합군 40만 명의 철수 작전을 그린다. 독일군의 공세에 밀려 방어선을 돌파당한 연합군은 9일 동안 공격을 버티며 33만8000명 병력을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한다. 비록 승리는 아니었으나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연합군은 전력을 온전히 보전해 반격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참전한 병력 상당수는 4년 뒤 다시 유럽 본토로 진공하여 승리에 쐐기를 박는다. ‘지상 최대의 작전’(1962)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등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만큼은 아니나, 덩케르크 철수는 전쟁의 전환점이자 영국 현대사에 길이 남는 영광의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철저히 사실에 가깝게 재현하면서 참전용사의 시점에 따라 전장을 비춘다. 아이맥스(IMAX) 70㎜ 카메라로 촬영한 광활한 파노라마 영상은 당시 덩케르크가 처해 있는 듯한 현실감으로 관객을 몰아넣는다. 106분 동안 영화는 독일 공군의 폭격, 침몰해가는 어선과 비행기 실내에 차오르는 물 등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기 상황을 반복하며 총격과 폭발음의 묵직한 사운드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 주력한다. ‘덩케르크’는 닥쳐오는 죽음과의 사투라는 극한의 상황을 영화적 테크닉으로 자아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안간힘 쓰는 참전 용사의 심리에 동조하게 만든다.

서사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시청각적 경험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영화의 연출 기조는 영화적 경험의 원형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시 상기하게 한다. 1896년 1월 25일, 영화의 발명자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시오타 역에서의 열차의 도착’을 상영했다. 음향도 들어가지 않은 무성영화에 각본도, 배우도 없었다. 말 그대로 열차가 도착하는 풍경만 담긴 50초 분량의 영상이었지만, 처음으로 영화라는 걸 경험한 관객은 스크린 평면을 뚫고 나올 듯한 열차의 움직임에 놀라워하며 활동사진의 박진감에 빠져들었다. 영상을 통한 현실의 재현, 영화의 20세기가 막을 여는 순간이었다.

195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영화 산업의 미래가 위협받자 영화사들은 좁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여줄 수 없는 차별된 볼거리를 만들어내며 안방에 틀어박힌 관객을 극장에 끌어들였다. 대형 서사극의 걸작으로 꼽히는 ‘벤허’(1959)와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가 바로 이 시대의 유산이다. 일반적인 영화에 쓰이는 35㎜ 필름보다 훨씬 선명한 70㎜ 필름의 고해상도에 장대한 크기의 시네마스코프 영상으로 펼쳐진 고대 로마 제국과 아라비아 사막의 생생한 풍광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며 재창조된 역사의 공간 속으로 관객들을 빨아들였다.

‘덩케르크’의 촬영에 IMAX 필름과 일반 70㎜ 필름을 투입한 놀란 감독의 결정은 과거 70㎜ 영화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시각적 생동감과 규모의 경이로움을 21세기에 다시 불러오고자 한 시도에 가깝다.

‘덩케르크’에는 어떠한 드라마도, 극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도 없다. 단지 재현된 역사적 사건만이 던져질 따름이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공감각적 체험이 영화의 이상이라면, ‘덩케르크’는 더없이 그에 충실한 결과물이 되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