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충남 당진에서 '당진 동학대도소' 보존을 위한 간담회가 있었다. 간담회 후 당진시, 충남개발공사 측과 동학·천도교 측은 당진 동학대도소 보존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정읍 하면 동학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충남 당진에서 동학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당진은 동학혁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커다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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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훼손된 승전목 전승지. 동학군이 일본군을 이긴 유일한 곳이다. 당진시 면천면에 있다. 심국보 제공 |
당진 동학대도소는 동학혁명 당시 북접 통령이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머물던 가옥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동학대도소이다. 123년 전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 지도부는 와해되었고 최고 지도자 해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후 손병희를 비롯한 동학의 최고 지도부가 은신 잠행했던 곳이 당진 동학대도소이다. 당진 시민들과 동학, 천도교 관련 단체들은 당진시와 충남개발공사에 동학대도소의 원상 복원을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동학대도소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또 당진에서 주목해야 할 동학 사적지로 승전목이란 곳이 있다. 승전목은 동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이긴 유일한 곳이다. 맨주먹이나 다름없던 동학군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동학군이 일본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별동대장 이종만을 중심으로 80여 명 별동대가 레밍턴 소총으로 무장하고 지형을 활용한 유격전을 감행하는 등 치밀한 전술을 구사한 덕분이었다.
지난해 11월 당진시 면천면 승전목 전승지 현장에서 당진시장을 비롯한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122년 만에 처음으로 승전기념식이 열렸다. 승전목의 토석은 한보철강 공사 당시 바다를 매립하는 데 헛되이 사용되어 지형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승전목 지형은 도로가 나면서 원상복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다.
당진 지역의 동학이 전라도 지역 동학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전봉준이 중심이 되었던 1894년 1월의 고부민란을 혁명이라 여기지 않지만,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명백하다. 당진에도 고부민란과 같은 농민봉기가 있었다. 동학도들이 중심이 된 합덕농민봉기는 정읍의 고부민란보다 한 달이나 빨랐다. 당진을 포함한 서산 태안 예산 아산 홍성 일대 내포동학군의 규모는 호남동학군과 비교해도 그 규모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다만 호남 지역의 동학에 비해 당진 또는 내포 지역 동학에서 부족한 것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처럼 제대로 알려진 걸출한 영웅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동학군이 유일하게 승리한 곳이 당진이며, 고부민란보다도 먼저 '합덕민란'이 일어난 곳도 당진이었던 만큼, 중심 세력이 없을 수 없다. 최근 당진동학의 지도자로 대접주 이창구의 행적이 조명되고 있다. 내포 지역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박인호 박희인 이창구 이종만 등의 동학지도자들의 행적 역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동학혁명 하면 '호남벌판 말달리던 녹두장군'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1894년 봄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시작하여 함경도 지역을 제외한 북한 지역에서도 동학군이 전면적으로 봉기한, 어느 한 지역의 국지적 사건이 아니었다. 전라도, 전봉준 중심의 동학혁명사는 다시 써야 한다.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