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서 나고 자란 청년은
- 고향을 닮은 밀양에 터를 잡고
- 30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누나
- 스승을 알아본 제자의 선물
-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을
-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 잔잔한 밀물처럼 마음을 채운다

따가운 햇살을 가득 담은 밀양강이 부드러운 빛을 내면서 천천히 흘러갔다.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영남루가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이곳은 삼문송림 수변공원이다. 고증식 시인도 이 길을 즐겨 찾는다.

	고증식 시인이 밀양강이 흐르는 영남루 아래서 포즈를 취했다. 고 시인은 30여 년간 밀양에서 교사로 학생들과 어울리며 함께 공부하고 시를 쓰며 살고 있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음도 탁 트이죠. 그리고 여길 자주 찾는 이유가 또 있어요." 이 길에는 그가 밀양에 와서 만난 스승이며 선배인 고 이재금 시인의 시비가 있다. 강변을 천천히 걷던 그는 시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재금 선생님을 만나 밀양문학회를 만들고 '밀양문학'도 창간하고. 밀양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산 지 어느새 30여 년이네요."

고증식 시인은 1959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원주고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과 문학모임을 만들고 동인지 '울림'도 펴냈다. 충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1986년부터 부산 예원정보고에서 1년 남짓 국어를 가르쳤다. 1988년에 밀성제일고로 옮기며 밀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그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밀성고에서 재직하고 있다.

고 시인은 1994년 '한민족문학 4집'에 시가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2000년 첫 시집 '환한 저녁'을 시작으로 '단절' '하루만 더'까지 3권의 시집과 국제신문 '아침의 시'에서 소개한 시를 묶은 시평집 '아직도 처음이다'를 펴냈다. 시집에는 "마음으로 가닿은 풀꽃 같은 이웃들 속에서 마알간 시 한 편 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살고"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고, 시평집에는 그런 눈으로 찾아낸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

■잔잔하게 밀려와 마음을 채우는 시

	하루만 더- 고증식 지음/애지

2010년 펴낸 '하루만 더'에 수록한 '시인의 말'에서 그는 고백했다. "편집자는 독한 쐐기 서너 편, 하고 아쉬워도 했으나 사는 게 헐렁한 나로서는 여전히 멀고 아득한 숙제다."

독하게 와서 박히는 시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시는 잔잔하게 밀려오되 이내 온 바다를 다 채우고야 마는 밀물처럼 마음을 채운다. 사소한 일상의 풍경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마치 진실한 사람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기분이다.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가족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시 '형의 쌀자루'에는 형의 사랑이 배어있다. 그가 원주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근처에서 하숙했다. 형이 매달 하숙비로 쌀 일곱 말을 가지고 왔다. "월말이 되면 하숙집 마루에서 쿵 소리가 나곤 했는데 후다닥 나가보면 십리길 걸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쌀자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거기 있었다"는 시구절은 쌀자루를 짊어지고 공부하는 동생을 응원하러 온 형의 굵은 땀방울을 짐작하게 한다.

형뿐이랴. 세상 누구보다 따듯했던 누나도 있었다. 누나는 고명딸이었지만 아래위로 치받쳐 고단한 처지였다. 그래도 시인이 가장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넓은 언덕이 되어주었다. "제대하고 부산에 와 있었던 이유도 누나가 부산으로 시집와 있었던 덕분이죠. 시동생이 6명이나 있었는데, 저까지 끼어 지냈으니까요. 취직 못 한 백수 시절, 누나는 제게 가장 큰 물주였어요. 누나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금정도서관에서 공부했죠."

시인은 짧지만 가슴 뭉클한 시 '누나'에서 그리움을 이렇게 고백한다. "밤늦도록 부엌방에 불빛 일렁이더니 새벽녘 첫 차 타러 나온 내 손에 가만히 물 묻은 손이 다가와 얹혔다 시댁식구들 몰래 따라 나온 구겨진 지폐 몇 장"

■고향 닮은 땅에서 만난 사람들

시인의 안내로 밀양시 내일동과 내이동을 경계로 흐르는 해천을 걸을 때였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인사했다. "밀성제일고, 밀성여중, 밀성고…. 30여 년간 가르쳤더니 학생들뿐 아니라 가는 곳마다 제자들을 만납니다. 행복한 일이지요." 우연히 제자들을 만난 이야기를 담은 재미있는 시 한 편이 있다. '경민식당'이다. 진짜 생고기만 쓴다는, 밀양 택시들도 척 알아본다는 그 식당에 혼자 한잔 하러 갔다. 그런데 그 주인이 제자였다.

"그 사내 날더러 제자라고/ 얼굴도 몰라보는 날더러 선생이라고/ 국이나 끓여 드시라/ 뭉텅 고기까지 한 칼 안겨주는데/ 몸 둘 곳 없어라/ 아득한 허방 아래/ 문밖까지 따라 나온 저 불빛 한 점" 학창시절 선생님을 반가워하는 제자의 정겨운 표정이 떠오른다.

30년을 살아온 밀양. 이제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밀성고에 면접 보러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밀양에 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면접을 보러 온 날, 교정에서 막 망울을 터트리는 개나리를 보았습니다. 제 고향 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학교에 근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부산의 다른 학교 몇 곳에서도 연락이 왔지만 거절하고 고향을 닮은 밀양으로 왔죠."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고, 시골 풍경이 남은 도시인 밀양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상의 풍경이 담긴 그의 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 궁금할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책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