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득도 후 많은 영적을 보였다. 자신이 경험한 영적을 스스로 지은 '동경대전' '용담유사'에 낱낱이 기록했다. 수운의 득도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경주 용담으로 몰려든다. 진리를 체득하겠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삿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운을 숭배하고 우러러보며 신비화하고 절대시하려 하고 우상화하려한 사람도 있었다. 수운은 단호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 |  |
| 수운 최제우가 해월 최시형에게 남긴 유시. 글쓴이는 전 천도교교령 이영복이다. |
"나를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말가."
사근취원(捨近取遠), 가까이 있는 것을 버리고 먼 데서 구한다는 말이다. 수운은 사근취원하지 말라고 누누이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하느님, 천주님 등 신(神)이나 절대자, 진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람마다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애써 밖에서 진리를 찾지 말라는 당부였다.
수운은 1863년 새해를 동해안 영덕에서 지내며 동학의 기본 조직인 '접(接)'을 체계적으로 정비한 후 봄이 되자 다시 경주 용담으로 돌아간다. 수운은 1860년 득도 이후 많은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자 경주 용담으로 오자, 관의 지목을 피해 전라도 남원 땅으로 몸을 숨겼다가 영덕과 같은 동해안 한적한 바닷가로 숨어 다녀야 했다. 다시 경주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보였다.
'도는 당신에게서 나왔으니 스스로 당하겠다'며 수운은 다시 경주 용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경주 관아에 체포되었고, 득도 후 겨우 3년 정도 활동하다 조선 왕조의 폭압에 목숨을 잃었다. 사이비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목을 피해 요리조리 숨어다녔을 것이다. 사방에 뿌려놓은 조직을 찾아다니며 목숨을 연명하고 숱한 화제를 뿌렸을 것이다.
그랬으면 동학, 천도교는 없었을 것이다. 수운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지상의 권력과 부와 타협하지 않았다. 처형되기 직전 수제자 해월 최시형에게 최후의 시 한수를 남겼다.
'등불이 물 위에 빛나니 의심할 틈이 없고, 기둥은 말랐으나 떠받치는 힘은 넉넉하리라.'
조선 왕조는 나를 처형하려고 갖은 혐의를 잡으려 하지만 물 위에 등불을 비춰 찾아보아도 나에게는 의심할 틈새가 없으며, 나는 처형되겠지만 나의 가르침인 동학의 힘은 굳세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수제자 해월에게 당부하였다. "동학은 나에게서 나왔으니 내가 스스로 당하겠다. 너는 멀리 도망가 도를 펼쳐라."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