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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화분 /양정규

출입문을 열고 막 나서려던 그녀 앞에 화분 하나가 너무나 갑자기 떨어졌다

아이가 그린 큰 칼 들고 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그림과 똑같았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7-01-01 19:00:12
  •  |   본지 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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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개나 고양이보다 화분이 더 무서웠다. 개나 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흔들거나 갸르릉 소리를 냈다. 화가 나면 털을 곤두세우고 눈을 치떴다. 하지만 화분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화분이 머금은 흙 속에 어떤 모양의 뿌리들이 숨어 있는지, 그 뿌리와 흙 사이에 어떤 생물체를 품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화분은 한없이 여린 얼굴을 하고 향기를 뿜어내지만, 그 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지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서로 엉켜 군집형태로 있을 수도, 여러 개의 알을 화분 속 어딘가에 촘촘히 박아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분 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여러 가지 일을 그녀는 상상했다. 그것이 속내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한없이 아름답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한 화분은 그래서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도자기든, 옹기류든, 토기든, 플라스틱이든, 무늬가 기하학적이든 화려한 채색을 한 것이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민무늬이든 모두가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믿지 못할 음흉함이 그녀를 더욱 긴장시켰다.


평소 그녀는 화분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것이 가능했다. 주변에 화분이 있더라도 눈길을 피하면 그만이었다. 가능한 한 멀리에서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주변 사람들, 심지어 그녀의 남편과 다섯 살 아들조차 그녀가 화분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녀가 화분을 집에 들여놓지 않는 것은 단지 그녀의 취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화분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그저 취향일 뿐이라고 믿었다. 개나 고양이를 싫어하는데 굳이 개나 고양이를 키울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비슷했다. 아침 8시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9시에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와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가구에서 먼지를 닦았다. 죽 한 그릇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아파트 단지 근처 병원을 돌아다녔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는 내과가 6곳, 치과가 3곳, 이비인후과가 2곳, 안과가 4곳, 피부과가 3곳, 정형외과가 3곳 있었다. 새로 병원이 들어설 때마다 새로 들어 온 물건을 구입하듯 꼭 그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았다. 그녀는 자주 아팠다. 자주 머리가 아팠고 배가 아팠고 설사를 했고 목구멍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은 허벅지 근육이 당기는가 싶었다가 무릎이 끊어질 듯 통증이 왔고 그 증상으로 정형외과에 갔을 땐 발바닥만 조금 시큰거렸다. 병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3시가 다 되었다. 3시30분쯤이면 어린이집 하교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 시간에 맞춰 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오늘은 아파트단지에서 조금 떨어진 대학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지난주 했던 내시경 검사 결과를 보기 위함이었다. 지난 여러 달 동안 소화불량과 설사 증상으로 동네 개인병원 여섯 곳을 돌며 진료를 받았었다. 결과는 비슷했다. 약 일주일 분 받아 가시면 됩니다. 정 힘드시면 주사나 한 대 맞으시고요. 그녀가 겪는 고통에 비해 의사의 진단과 처방은 너무 냉랭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녀는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제대로 된 처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약을 잘 먹지 않으면서 병이 잘 낫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계속해서 병원을 바꿔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면 증상이 잠시 사그라졌다가 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그 중 한 개인병원에서 진료의뢰서를 써달라고 말했다. 대학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는 이유였다. 오늘은 그 결과를 보기 위한 날이었다. 경쟁률 높은 대학이나 회사 면접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결과만 손꼽아 기다리던 지난 일주일 동안 그녀는 매일 전화를 기다렸다. 병원에서 급한 전화가 올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의 전화 말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악성종양이 발견됐어요, 같은. 그렇지만 그런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전화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병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혹시 그녀에게 직접 들려주면 안 되는 불치의 병이 발견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던 차였다.



그런 그녀 앞에 오늘 아침, 화분 하나가 떨어졌다. 병원에 가기 위해 아파트 현관 출입문을 막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출입문을 열고 막 나가려는 그녀 앞으로 화분 하나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낙하하며 툭, 떨어졌던 것이다. 바로 코앞으로 내리 떨어지며 박살난 화분. 손바닥만큼 작았던 화분, 두툼하고 단단해 보였던 도자기 화분, 하늘에서, 아니 20층 꼭대기 층,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어디에선가 툭 떨어져 내린 화분, 너무나 급작스럽게 아스팔트 바닥으로 내리꽂히던 화분, 내리꽂히자마자 수많은 파편으로 변해 튕겨져 오르던 화분, 깨어진 틈새로 검은 흙을 폭죽처럼 터뜨리던 화분, 흙덩어리 사이로 가느다랗게 비어져 나와 있던 뿌리, 뿌리에 엉겨붙어있던 알갱이들, 매끈한 알갱이와 거친 알갱이들이 서로 어긋나 날아가던 순간들, 순식간에 날선 파편들로 변한 화분이 속엣 것을 다 토해내고 그녀 앞에 널브러져 있는 순간, 그녀는 잊고 있던 화분에 대한 감정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화분에 심겨져 있던 식물이 다육이었나, 허브였나, 그녀는 그런 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화분 하나가 하늘 어딘가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던 그 순간만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 장면은 슬로비디오처럼 느렸고 클로즈업된 화면처럼 선명했고 케이블방송의 보험회사 광고처럼 지겹게 반복됐다.

그녀가 사는 통로의 어디쯤, 아니면 바로 옆 통로의 어느 지점에선가 떨어진 것 같았다. 누군가가 고의로 던졌을지도, 누군가 볕을 쐬어주려고 에어컨 실외기 위에 올려놨다가 강풍이 불어 날아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발짝만 더 앞서 걸었었다면 아마도 그녀의 머리가 화분의 파편처럼 쪼개졌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진짜 바람이 불었었나, 그녀의 동공이 허공을 훑어내며 바람의 방향을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바람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흩어져서 사라진 것인지도 모르지, 그녀가 모르는 어떤 순간에 강한 바람이 불었었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이러한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잠시 비틀거렸고 식은땀 때문에 블라우스가 겨드랑이와 등에 바짝 달라붙었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벌어진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났던 화분을 생각하니 머리끝 부터 발끝 까지 오스스한 소름이 돋았다. 하필 왜 내 앞에 그것이 떨어졌을까, 떨어진 것일까, 떨어뜨린 것일까, 실수였을까, 장난이었을까, 누군가 홧김에 던진 것일까, 누군가 떨어뜨린 것이라면 일부러 나를 조준하여 떨어뜨린 것일까, 그녀는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낯선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난주 아파트 화단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어떤 여고생의 서늘했던 눈빛도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여고생 곁을 지날 때 얼굴을 찡그렸던가, 코를 움켜쥐었던가, 여고생이 그녀 뒤에다 침을 뱉었었던가, 아니었던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그 화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떨어진 것인지 궁금하고 무서웠다. 조각난 화분의 파편들이 그녀의 뇌 속을 돌며 옥죄고 누르고 할퀴고 다니는 것 같았다. 단지 무섭게 느껴져서 피해 왔던 화분이, 이젠 그녀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피하는 것이 가능했던 화분이 이제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흉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그녀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닫혔던 창문들이 일제히 열리고 그 안에서 화분들이 쏟아져 내리는 환영들이 보였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뛰듯이 걸으면서 손톱 끝을 씹었다. 그녀의 손톱은 유난히 짧았고 손끝이 뭉툭했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는 행동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습관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가 실수를 해 놓고 손톱을 물어뜯을 때마다 그녀의 아빠가 했던 말이었다. 그녀의 아빠는 그녀가 우유를 엎질러도 괜찮아, 괜찮아, 장난감을 망가뜨려도 괜찮아, 괜찮아, 라는 말을 해줬다. 웃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거실에 가득 들어찬 화분에 물을 주면서, 가끔씩 햇살이 가득 들어오도록 베란다 문을 활짝 열면서 말했다. 반면,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실수하면 벼락같이 호통치며 잔소리를 했다. 아빠에게도 자주 덤벼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화분에 쏟는 시간의 반의반 만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좀 쏟아보라며 소리치곤 했었다. 그런 그녀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엄마는요? 엄마는 언제 와요? 엄마는 어디 갔어요? 그녀가 아빠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아빠가 대답했다. 병원에 계셔. 네가 아빠 말 잘 듣고 착하게 지내면 엄마가 다시 돌아온댔어. 아침마다 그녀를 꼭 안아주면서 착하지, 우리 아가, 조금만 참고 기다려. 우리 아가가 이렇게 잘 참고 기다리는 걸 알면 엄마는 기뻐할 거야,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빠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몸과 키가 자라고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뀌어도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에 있다던 엄마가 어떤 병원에 있는지, 어떤 병으로 가 있는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가 죽은 건지 살아 있는 건지조차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엄마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일 때도 그녀는 그것을 비웃음으로 느꼈다. 그녀는 그렇게 엄마 없이 학교를 졸업했고 결혼을 했고 아기를 낳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꾹꾹 참았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착하게 잘 지내는 방법이었다. 그녀가 착하게 잘 지내는 사이 그 도시에선 멀쩡하던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고 다리가 무너졌고 땅이 꺼졌다. 아이들이 배와 함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기도 했고 신호를 잘 지키며 정차해 있던 승용차가 신호위반한 레미콘에 깔려 납작해지기도 했다. 모든 불행은 전조 증상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대학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대기석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그녀의 눈에 창가에 줄지어 늘어선 화분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녀는 오한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움츠렸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할수록 늘어선 화분들만 시선 속에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화분이 병원 안에 있었다는 걸 그녀는 오늘 처음 알게 됐다. 화분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그녀를 맹렬히 쏘아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화분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려고 애썼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다가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스마트폰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개그프로그램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여자는 이어폰을 끼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 보였다. 소리 없이 웃던 여자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틀었다. 스마트폰 화면 대신 스마트폰의 뒷모습이 보였다. 스마트폰 뒷면에 박힌 애플사의 로고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녀는 스티브 잡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 멋졌었지. 언제나 검정색 터틀넥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걸쳤었지. 그는 혁명가의 몸짓과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었지. 세상을 바꿨었지. 그런 그가 갑자기 야위었지. 췌장암에 걸렸지. 그러다가 죽었지. 췌장암, 췌장암, 췌장암. 그녀의 눈앞에서 췌장암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스티브 잡스의 얼굴이 둥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간호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에 들어선 그녀의 눈앞에 커다란 컴퓨터 화면이 먼저 보였다. 3D 입체로 된 풀컬러의 내장 사진이었다. 의사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장 사진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중이었다. 의사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내장 사진은 윤기가 날 정도로 반짝거렸다. 의사가 말했다.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깨끗합니다. 그녀는 의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속이 더 쓰라리는 것을 느꼈다. 위장, 소장, 대장 어딘가가 깊게 팼거나 몹쓸 종양이 있는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그 이유를 그녀는 듣고 싶었다.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이죠?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왜 저는 계속 아프지요? 그녀는 이런 질문들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모니터 속 사진들만 이리저리 돌려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의사의 목소리는 무심하고 심드렁했다. 가끔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요, 일단 검사상 나타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방법이 없어요. 조금 더 지켜보시고 계속 불편하시면 다시 오세요.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긴긴 말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삼켜 버렸다.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진료실 문을 닫았다.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큰 병원에 가봐야겠어.



오후에는 동네 개인병원 피부과에 예약이 잡혀 있었다. 며칠 전부터 허벅지 안쪽에 좁쌀만 한 여드름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려워져서 긁다 보니 그 범위가 배 부분까지 번져버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부위의 살이 두툼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 앞에서 수줍게 바지를 내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허벅지 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부위는 배꼽 부근까지 번져 있었다. 그녀가 웃옷 끝자락을 말아 쥔 채 머뭇거렸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옷깃을 가로챘다. 간호사는 그녀의 가슴께가 훤히 보일 만큼 그녀의 웃옷을 둘둘 말아 올렸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의사는 그녀의 화끈거리는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주 잠시 허벅지와 뱃살 쪽만 슬쩍 보았을 뿐이었다. 그냥 딱 보면 안다는 표정이었다. 의사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판을 두드렸다. 약 처방해 드릴게요. 먹는 약이랑 연고 일주일만 발라보시고 안 나으면 또 오세요. 그녀는 의사가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마음으로 준비하는 중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잘못 먹은 음식은 없었는지, 오염된 물건을 만진 적은 없었는지, 얼마나 가렵고 불편한지, 다른 질병을 동반한 건 혹시 아닌지, 당분간 어떤 음식은 조심해야 한다든지 하는 말쯤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화가 났다.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서둘러 바지를 올려 입고 웃옷을 내렸다. 그녀는 허겁지겁 진료실 문을 나섰고 계산을 했고 처방전을 받았다. 병원 문을 나오면서 그녀는 처방전을 찢었다. 손톱 끝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새로 생긴 피부과에 가봐야겠어.



아이 올 시간이 다 되어 갔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쪽으로 서둘러 걸었다. 아파트 단지에 가까워질수록 화분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졌다. 하늘에서 갑자기 화분이 떨어져 그녀의 정수리를 강타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깨어진 파편들과 검은 흙덩이가 목덜미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속이 어지럽고 매스꺼웠다. 또다시 두통인가.

한동안 뜸했으나 그녀는 원래 자주 머리가 아팠었다. 가까운 동네 병원에서 일주일씩 연장해 가며 약을 처방받다가 큰 병원에 가서 MRI까지 찍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의사의 소견은 심드렁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네요, 의사는 MRI 촬영 기사의 소견이 적힌 영문을 대충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그 말을 반복했었다. 그녀는 실망했다. 그녀가 바라는 대답은 '이상 없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확실한 병명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의사들이 그런 말을 할 때 어쩌면 그렇게 눈주름 하나 떨지 않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 말은 마치 당신은 눈이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의 없게 들렸다. 차라리 당신은 눈이 하나이고 입이 두 개이기 때문에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해주길 바랐다. 검사 결과가 이상 없다,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불안하고 다급해졌다. 어떤 확실한 병명이 정해지길 기다렸다. 그녀가 느끼며 감내하고 있는 이 고통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 불치병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만약 의사로부터 당장 치료가 필요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녀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수치보다 높다고 하면 수치를 낮춰주는 약이나 음식을 찾아 먹으면 되는 거였다. 빈혈이 있다면 철분주사를 맞히거나 철분제를 먹이면 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염증이 생겨 열이 38도 이상을 찍으면 해열제를 먹어서 보통 사람의 체온인 36.5도 가까이로 만들어주면 되고 말이다. 뇌 구성 성분 중의 어느 한 부분에 이상이 생겼다면 지독한 항생제를 먹으며 팔뚝만큼 큰 주사를 수차례 맞더라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의사들은 아무도 해답을 주지 않았다. 주지 않는 것인지 주지 못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녀는 어린이집 차량이 멈추는 도로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관자놀이께를 눌렀다. 머리를 조여 오는 통증 때문이었다. 3시30분이 되자 노란색 어린이집 차량이 그녀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차량 보조교사가 내려왔다. 보조교사는 차 안에 서 있던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그녀 앞에 세워줬다. 아이는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그녀의 품속으로 와락 안겨 매달렸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는 눈을 신경질적으로 깜빡거렸다. 눈이 감길 때마다 한쪽 얼굴 근육을 씰룩거렸다. 보조교사는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한 후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떠나자 아이는 눈을 더욱 심하게 깜빡거렸다. 아이는 그녀의 목덜미를 놓칠세라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그녀가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헤아려 보았던 손가락.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일지도 몰라. 아니 하나가 덜 달려 있으면 또 어떡하지 하는 마음으로 긴장하며 세어봤던 손가락들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다섯 개여서 안도했었지. 그랬었지. 아이는 다섯 살치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얼핏 보면 서너 살 정도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런 데다 아이는 밖에서는 혼자서 잘 걷지 않았다. 어린이집에서는 마치 모터 달린 오토바이처럼 매번 뛰어다닌다는 아이였다.



아파트 통로 현관이 가까워지자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늘 아침에 그녀 앞으로 떨어졌던 화분의 잔해가 아직도 몇 점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마치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그곳을 비껴 걸으면서도 자꾸만 화분의 파편 쪽으로 몸이 쏠려 넘어질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아이를 안은 그녀의 손목에 힘이 빠졌다. 가까스로 10층 버튼을 누른 그녀가 다시 아이를 바투 안았다. 느슨하게 매달려진 아이가 그녀의 목덜미를 더욱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향해 가면서 어제 어깨를 부딪쳤던 낯선 남자와 담배 피우던 여고생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집에 도착한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아이를 거실 바닥 위에 짐짝 부리듯 내려놓았다. 그녀의 가슴께가 땀으로 축축했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 앞으로 아이가 느릿느릿 기어왔다.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기어 올라와 또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면서 아이에게 소리쳤다. 저리 가! 귀찮아!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의 손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아이는 거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이는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조금 전보다 더 자주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녀는 방금 아이에게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던 말과 행동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해달라는 대로 곧잘 해주었다. 참을성 많고 마음 넓은 엄마라는 주변의 칭찬을 즐겨 듣던 그녀였다. 그녀는 아이가 죽도록 밉고 싫어질 때가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그런 마음을 숨기려 했다. 어떻게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을 미워할 수가 있단 말이지, 그건 말도 안 된다. 그건 사람도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누구에게나 모성애가 생긴다는데 그녀에게는 웬일인지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그녀는 아이에게 가끔씩 이런 말을 푸념처럼 내뱉었다. 이 말 속에는 아이를 향한 그녀의 묘한 질투심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솔직히 아이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는 엄마의 손길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날마다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엄마에게 얼굴을 부비고 살면서도 더 많은 걸 요구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이 못마땅했다. 불공평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엄마라는 존재가 그녀의 아이에게는 엄마-즉, 자기 자신-이 있다라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되었다가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아이에게 그런 속마음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이게 다 오늘 아침 하늘에서 떨어진 화분 때문인 것만 같았다.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것도, 말이 어눌한 데다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것도, 그 원인이 다 아이 엄마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녀는 아이를 위해 키 성장에 좋다는 영양제를 먹이고 스피치 학원에도 데리고 다녀봤으며 안과에도 갔었고 피부과에도 갔었다. 그녀는 자주 아이의 키를 재고 발음 연습을 시켰으며 아이 눈이 약시나 원시라는 진단을 받을 때까지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그녀는 아이를 염려하고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보통의 엄마들과 같아 보였다.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는 건 피부 건조증 때문일 거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보습력이 뛰어난 크림을 사서 발랐더니 훨씬 좋아졌어요, 라는 말도 덧붙였다. 증상이 심해지면 가끔 피부과에도 갔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그녀의 방문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피부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상담치료를 받아 보시는 게…. 그녀는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말하고는 재빠르게 일어섰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뇌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진짜!



아이는 맥없이 거실에 널브러져 있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어린이집 가방을 뒤적거렸다. 하얀 종이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반으로 접힌 도화지였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도화지를 펼쳤다. 그녀의 눈빛이 금세 서늘해졌다. 펼쳐 든 도화지 속에는 날 선 칼과 톱날, 총 같은 무기들로 가득했다. 가운데에 화 난 표정을 하고 있는 듯한 작은 사람도 그려져 있었는데 자기 몸통보다 훨씬 큰 칼을 들고 있었다. 색깔은 단 한 가지, 검정색뿐이었다. 아이는 항상 검정색 크레파스만 사용했다. 48가지 크레파스가 있었는데 다른 색은 새것 그대로였고 검은색만 닳고 닳아 손톱만큼 작아져 있었다. 검은색 크레파스로 굵게 때론 가늘게 돌려가며 섬세하게 그려낸 것들이었다. 어제의 그림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다. 이토록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총이나 칼 같은 장난감을 사 줘 본 적이 없었다. 총이나 칼은 장난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일 때 사용하는 살상무기가 어떻게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일 수 있을까,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네가 좀 다른 걸 그렸으면 좋겠어. 창밖을 봐. 구름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빌딩도 있고 의자도 있고 나무도 있잖아?

그러자 아이는 창밖을 보는 대신 다시 어린이집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이는 신문지 뭉치로 쌓여진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는 그걸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나무, 나무. 아이는 어눌한 발음으로 나무, 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이는 그녀 앞에서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조금 흥분한 듯 보였다. 아이가 서툰 손짓으로 신문지를 벗겨냈다. 화분이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이를 밀어냈다. 그녀 앞으로 자꾸만 다가오는 아이를 발로 밀고 손으로 쳐냈다. 그녀는 아이가 들고 있는 작은 화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화분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 순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갖다 버려. 당장! 그건 위험한 거야. 폭탄 같은 거라고! 알겠어?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됐다. 아이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 됐다. 뒷걸음질 치던 아이는 베란다 쪽으로 달려갔다. 베란다 창밖으로 화분을 재빨리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는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웃고 있는 아이의 눈꺼풀은 쉴 새 없이 깜빡였고 한쪽 얼굴은 박자를 놓친 연주자처럼 두서없이 서두르며 씰룩거렸다. 그녀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베란다 쪽으로 뛰어갔다. 10층 아래로 곤두박질친 화분의 파편이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다행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아이가 화분을 던지는 걸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녀의 가슴은 고장 난 세탁기처럼 덜컹거렸다. 그녀는 베란다 문을 힘껏 닫았다. 그리곤 아이를 거실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엄마가 분명히 말했지. 위험하니까 갖다 버리라고. 갖다 버리라는 말은 바깥으로 내던지라는 뜻이 아니야.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뜻이라고. 못 알아듣겠니? 똑똑히 들어. 엄마는 전혀 모르는 일이야. 네가 한 잘못이야. 네가 한 거야. 너 혼자서 놀다가 실수로 그런 거야. 알겠어?

그녀는 날 선 말들을 쏟아내곤 바로 후회했다.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 앞에 꿇어앉아 표정을 바꾸었다. 아이의 두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착하지, 우리 아가. 가끔 바람이 불면,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화분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도 있는 거야. 네가 던진 게 아니야. 바람이 그런 거야. 그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결 차분해진 말투였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눈을 좀 더 심하게 깜빡거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바깥을 살피고 나서 커튼을 쳤다. 오후 볕이 있는데도 저녁 같았다. 그녀는 몸이 얼었다 녹은 것처럼 노곤해졌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하얀 침대보가 깔린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푹신한 메모리폼 매트가 그녀의 몸에 맞춰 푹 꺼져 들어가면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비좁은 자궁 속에 맞춤하게 들어찬 모양새였다. 바람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맴돌다가 거세어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길 반복했다. 조금 전엔 없던 바람이었다. 그녀에게 바람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녀는 바람 소리에 맞춰 눈을 깜빡깜빡 하다가 어느새 깊이 잠이 들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다섯 살 아이가 되어 있다. 다섯 살의 그녀는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현관에 들어서자 풀내음이 풍긴다. 거실은 고요하다. 거실 깊숙이 달빛이 길게 들어와 있다. 크고 작은 화분이 들어차 있는 거실은 깊고 어두운 수풀 속 같다. 거실 등 스위치를 켠다. 형광등 불빛이 켜졌다가 깜빡깜빡 점멸하다 꺼져버린다. 다시 등 스위치를 켠다. 켜진 불빛이 떨린다. 불빛은 파르르 떨다가 마침내 꺼진다. 다섯 살의 그녀가 엄마를 부른다.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대답이 없다. 신발을 벗고 거실 위로 올라선다. 올라선 발바닥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밟힌다. 단단하고 뾰족하다. 뾰족한 파편이 발바닥을 찢는다. 새하얀 양말 위로 빨간 피가 스민다. 그녀의 발밑에 화분 하나가 조각나 있다. 초록색 풀이 뿌리째 뽑혀 있고 흙더미는 검고 크다. 해체된 화분 속에서 지렁이가 나온다. 미끈하고 기다란 몸뚱이. 다리도 없이 방향도 없이 미끄러져 나아간다. 긴 몸통을 움츠렸다 폈다 하면서 움츠린 만큼 길게 앞으로 나아간다. 지렁이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더듬이도 없다.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면서 꿈틀거린다. 그녀는 점점 무서워진다. 부서진 화분만 내려다보며 운다. 모든 일을 지켜보았을 화분은, 다섯 살의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부서진 채 죽어 있다. 달빛도 점점 빛을 잃는다. 거실 한가득 어두움이 차오른다. 혼자 있는 그 집은 거대한 화분 같다. 다섯 살의 그녀는 베란다에 줄지어 선 화분들을 하나씩 아래로 떨어뜨린다. 화분이 부서져 파편이 된다.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려온다.



세찬 바람에 덜커덩, 창문이 흔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누군가의 비명 소리인 것만 같았다. 저녁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했다. 신호음만 갈 뿐 받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헛구역질이 났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손톱을 씹었고 손가락 끝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녀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빨리 와. 어디야. 나 불안해. 죽을 것 같애.



그러다 그녀는 등 뒤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반으로 접혀 있는 8절 도화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가 도화지를 펼쳐 들었다. 낮에 본 그림이었다. 제 몸집보다 큰 칼을 손에 들고 누구라도 죽일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얼굴은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가 있어 무서운 느낌이 바로 들었다. 누가 보아도 아이가 아이 자신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 같았다.

그런데 낮에는 보지 못했던 화살표와 글씨 같은 것이 보였다. 글씨는 삐뚤빼뚤하게 흘려 쓴 상형문자 같았고 화살표는 사람 그림을 향해 있었다. 상형문자 같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조합해 보니 엄, 마, 라는 글자였다. 순간, 그녀는 어디선가 습한 흙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 안 구석구석에서 지렁이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천장에 푸른 풀이 자라고 방은 거대한 화분 속처럼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면에 있던 화장대 거울 속에 그녀가 서 있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아이가 그린 그림 속 칼 든 사람과 흡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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