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주의 예술인과 교류 확대
- 비판·성찰 노랫말서 더 나아가
- 서구적 음악형식 탈피 실험
- 성과 미약했으나 퓨전국악 초석
- 그의 시대정신 '노찾사'가 이어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청년들은 두 가지의 시대적 화두를 안고 있었다. 4·19 혁명 이후 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다시 독재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 하나였다. 바로 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저항을 더 높은 수준에서 수행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문화적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골수 친일파의 전력이 있는 박정희가 1964년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을 본 대학생은 박정희의 친일이라는 약점을 한국의 전통문화 재발견을 통해 공격하고 미국 지향적인 박정희 정권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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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기의 음반(1971년) 표지. 거친 입자의 사진으로 표현한 우울한 표정은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나타낸다. 김형찬 제공 |
김민기의 음악이 뛰어난 점은 트윈폴리오를 비롯한 다른 통기타 음악인들이 대학생의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때,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라는 화두를 개인적 심정으로나마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김민기의 노래가 가사에서는 진보적이었지만, 문제는 음악어법이었다. 그가 작곡한 노래는 탁월한 수준이었지만, 서구적 음악어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김민기가 자라면서 보고 들은 음악은 모두 서구 음악이었다.
이런 김민기의 고민은 그가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면서 전환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첫 음반을 발표하고 난 1971년 겨울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게 될 문화활동가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김민기는 PONTRA 라는 이름의 모임에 참가하여 비판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한국의 문화예술계 선배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의식을 더욱 벼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김민기의 음악적 전환은 새로운 음악인들과 교류로 더욱 확장된다. 1974년 김민기는 서울대 작곡과 출신의 이종구와 1980년대 중반부터 국악가요를 개척하게 되는 김영동을 만난다. 1974년 3월 이종구 작품발표회에서 김민기가 대본을 쓰고 이종구가 작곡을 한 소리굿 '아구'를 무대에 올리면서 김민기의 한국 음악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 성과물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곡이 '가뭄' '식구생각' '빈산' '밤뱃놀이' 등인데 이 곡들은 김민기 1집에 수록된 노래와 달리 5음계 선율에 국악 장단을 지녔다. 한국의 통기타 음악이 미국 음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당시 김민기의 한계였다. 이런 곡들은 한국의 전통음악이 일제강점기 신민요 이후 처음으로 현대화되는 시도를 김민기라는 아마추어가 수행한 것이었다. 한국적인 5음계에 국악의 장단을 기계적으로 붙이는 단순한 시도를 넘을 수는 없었기에 그 성과는 크지 않았고, 시도에 만족해야만 했다. 수백 년을 이어오다가 개항 이후 단절된 전통음악을 현대화한다는 무게를 김민기라는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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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YWCA 강당에서 열린 21회 청개구리 공연에서 반주하는 김민기(왼쪽). |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라는 화두는 2000년대에 접어들어 국악을 전공한 진보적인 젊은 음악인들이 퓨전국악이라는 새로운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1970년대에 김민기가 시도한 이래 30년 만에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럼에도 김민기가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룩한 성과는 놀라운 수준이다.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밥 딜런이 시도했듯이 오락과 위안의 음악을 성찰과 비판의 음악으로 격상시킨 것인데, 김민기 자신은 한사코 시대를 비판하는 의도로 음악을 작곡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수용자들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시대를 비판하는 음악으로 받아들였기에 김민기 노래는 수용자에 의해 의미가 확대되고 변형된 또 하나의 성과를 이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민기의 노래를 이루는 음악어법의 수준도 탁월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구사한 가사와 거기 맞는 선율과 구조의 선택은 마치 1960년대 중반 한국 문학계에서 한글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반격을 가한 것과 같은 수준의 음악적 성취였다. 가사 내용을 받쳐주는 뛰어난 코드 진행과 기타 반주는 미국 대중음악을 카피하던 당시의 수준과 비교하면 독보적이었다.
이러한 묵직한 음악적 화두를 한 가지만 제대로 수행하더라도 뛰어난 음악인으로 평가될 텐데 혼자서 다 해내었으니 김민기는 천재라 할 만하다. 그래서 김민기가 정식으로 출반한 단 한 장의 음반이 한국 대중음악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반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김민기가 제시한 성찰과 비판이라는 화두는 1980년대 중반에 후배들이 만든 노찾사라는 민중가요 팀으로 이어졌고 여기서 활동한 김광석은 한국 포크 음악의 적자로 자리매김하였다. 김광석의 음악을 듣고 자라난 현시대의 젊은 음악인들은 음악의 일상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균형 있게 갖추게 되었고 현재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도전을 받는 국면에서 음악인으로서 음악으로 사회에 참여하며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다. 대중음악저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