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윈폴리오에 빠져 연세대 유급
- 경희대로 옮기고 돌연 "음악중단"
- 그 뒤 새 동료 김세환 만나고
- DJ로 영역 넓히다 또 유급 위기
- 72년 결국 두 번째 은퇴 선언
영화 '세시봉'에서 음악감상실 '세시봉'의 '대학생의 밤' 무대에 섰던 가수 중에 가장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사람은 윤형주이다. 일류 대학 의대생에다가 아버지도 교수고, 잘 생기고, 패션 세련되고, 목소리마저 매력적이니 여학생들이 좋아할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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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로 활동할 당시의 윤형주(연도 미상). 김형찬 제공 |
이런 윤형주가 미래에 스타가 될 거라는 조짐은 이미 있었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합동카니발에서 노래 부른 이후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TBC-TV에 출연하고 나서 등교하는데 여학생들이 윤형주를 알아보고는 "쟤다"하며 몰려든 일이 있었다. 윤형주의 대중적 매력의 힘을 증명한 사건이다.
1966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한 윤형주는 공부보다는 여러 음악 활동에 몰두한다. 연세대 최초의 록 그룹 '피닉스'를 결성해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했다.(윤형주는 베이스 기타) 같은 해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장희, 유종국과 함께 '라이너스'라는 포크 트리오를 만들어 1967년 봄까지 활동하고 이어서 10월부터 트윈폴리오를 만들어 무대에 서느라 유급을 하게 되어 1968년에는 경희대 의대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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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형주(오른쪽)가 1971년 YWCA의 청개구리 공연에서 김세환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 |
트윈폴리오는 인기가 대단하여 라디오와 TV 출연은 물론이고 '오비(OB)스캐빈' 같은 업소에 출연하느라 '세시봉'에서 노래 연습과 편곡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경희대 의대로 옮기고도 학업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고, 2년 예과 생활을 했지만 수업 일수가 모자라 또 유급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음악을 그만두고, 본업인 학업에 몰두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 바람에 1969년 크리스마스 공연이 갑자기 윤형주의 '첫 번째' 은퇴공연이자 트윈폴리오의 해체 공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1970년부터 경희 의대 본과 1학년에서 비교적 학업에 충실했던 것 같다. 이때 윤형주는 송창식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음악 동료를 만난다. 봄에 신방과 신입생환영회에서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김세환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해 여름 대천해수욕장에서 우연히 또 김세환을 만난다. 해변에서 알게 된 여학생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즉석에서 30분 만에 '라라라'를 작곡했다. 이것을 계기로 김세환과 화음을 맞추어 노래하게 되었다. 송창식과 함께한 트윈폴리오는 이질적인 목소리의 화학적 결합이었지만, 김세환과의 노래는 동질적인 부드러운 미성의 결합이라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김세환과 노래한 과정이 1971년 6월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3'이라는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윤형주와 김세환이 각각 앞뒷면을 자신의 팝송 번안곡으로 채운 '윤형주 김세환'의 데뷔 음반이다.
여기에 수록된 윤형주의 자작곡 '라라라'는 꽤 인기를 얻는다. 음반은 판매량 1만 장을 돌파한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방송윤리위원회는 '라라라'가 패티김의 노래 '사랑이란 두 글자'의 표절이라며 방송금지를 선언해버린다. 이 곡이 금지되지 않았으면, 윤형주는 또 방송활동을 하느라 학업을 소홀히 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정작 학업에 진짜 지장을 주게 되는 일은 1971년 3월에 시작되었다.
1970년부터 각 라디오에서 젊은이를 위한 심야음악방송을 경쟁적으로 신설하기 시작했다. MBC에서는 이종환이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 TBC에서는 박광희가 진행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 DBS에서는 최동욱이 진행하는 '0시의 다이얼'이 불꽃 튀기는 경쟁을 벌였다. TBC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DJ 최동욱을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자로 데려가 버리자 DBS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젊은 층에 인기 있는 가수를 진행자로 대체한다는 과감한 작전을 구사한다.
DBS에서 최초로 음악프로 진행자를 인기 가수로 채용한다는 작전의 목표는 바로 윤형주였다. 얼떨결에 끌려간 방송국에서 윤형주는 처음엔 학업 때문에 거절한다. 하지만 라디오 국장이 윤형주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공부에 지장이 생긴다면 바로 돌려보내겠다는 다짐을 받아내자 윤형주는 방송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미 대학 축제 사회자로서 이름을 날린 윤형주는 방송에서 음악이 아닌 새로운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진행 능력은 물론이고 참신한 기획력으로 '0시의 다이얼' 전임자인 최동욱의 공백을 메운 것은 물론이고 앞서가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초대 손님과의 대화에서 DJ가 주도권을 쥐고 상대방에게 제한된 얘기만을 시키는 방식이 아니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주고 자기는 얘기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DJ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렇게 윤형주는 재치와 센스,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처리하는 순발력 등 방송이 요구하는 재능을 모두 갖추었으니 DBS의 안목이 탁월했다. 하지만 의대생 신분으로 밤 11시25분부터 새벽 1시까지 매일 생방송을 한다는 것은 학업과 방송의 주객이 전도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1972년 2학기에 뒤떨어진 학업을 보충하느라 휴학계까지 내게 되었지만, 결국은 10월 24일 방송을 그만두고 방송연예계를 떠난다는 두 번째의 은퇴선언을 하게 된다.
대중음악저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