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미디어 시대
- 언론 보도의 공공성과
- 프라이버시 침해 논의

"신문사에서 보도한 살인사건의 피의자(피해자) 가족입니다. 실명을 안 썼지만 우리 가족의 이야기라는 것이 알려져 피해가 심각합니다. 인터넷 기사가 퍼져 막을 방법도 없네요. 기사 삭제를 요청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명예훼손 등 법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기자로 근무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런 메일 앞에선 머리가 복잡해진다. '기사가 뭐가 잘못됐나' '잘못 쓴 것도 없는데 기사를 삭제해야 할까'. 결국 내부 논의를 거쳐 인터넷 기사 삭제 여부를 판단하게 되나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심경을 떨치기 쉽지 않다.

인터넷이 확산되고 정보가 넘쳐나면서 온라인에서 '나의 기록'을 지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기술 발달로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사소한 실수나 오래전 저지른 일이 인터넷을 타고 전파돼 '마녀사냥'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세태가 온라인에서 '나'를 지우는 '잊혀질 권리' 요구로 이어진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대상이 언론사라면? "몇 년 전 절도를 저질렀지만, 죗값을 치르고 사면받아 기록도 없는데 여전히 내 이름을 검색하면 기사가 뜬다. 삭제해달라"란 요구를 받는다면 상황은 좀 복잡해진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언론 보도의 공공성과 개인의 프라이버시 존중 문제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기억을 지우라는 '잊혀질 권리'와 '언론의 자유'가 충돌하는 정보화 사회의 지점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저자는 '한겨레' 기자이면서 IT 전문 저널리스트로 '잊혀질 권리'를 수 년째 연구해왔다.

정보화시대에서 '잊혀질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공공적 성격을 띠는 신문·방송 기사를 삭제하는 것은 언론의 중요한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시대를 기록하는 언론의 역할을 부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배경으로 정보기술 발달에 따른 인터넷 매체의 증가와 달라진 언론 환경을 꼽는다. 인터넷 매체가 늘면서 기사량도 증가하고, 사실 확인과 신중한 퇴고보다 신속성을 우선하는 속보 경쟁이 치열해졌다.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나'가 노출되고, 프라이버시를 위한 기사 삭제 요청도 기하급수로 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잊혀질 권리'에 관한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 언론중재법 등에 '잊혀질 권리'가 언급되긴 하나 명확한 기준과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기사 삭제와 관련해 언론사는 데스크의 판단이나 회사의 윤리강령을 따라 보편적인 잣대가 없다. 저자가 기자 32명을 대상으로 '잊혀질 권리'에 관한 의견을 묻자 '기사가 과거 기록인 만큼 상황 변화를 이유로 수정해서 안 된다'와 '기술 변화와 사용자 접근성이 달라진 미디어 환경을 고려해 언론의 기준이 변해야 한다'가 맞섰다.

저자는 미국과 유럽연합 사례를 들며 기자협회나 편집인협회 등에서 '잊혀질 권리'를 논의하고 대응전략을 모색하자고 한다. 이 문제는 언론 뿐만 아니라 인터넷 글을 쉽게 퍼나르는 개인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저자의 마지막 메시지가 길잡이가 될 수 있겠다. "결국 잊혀질 권리가 기술에 사람을 맞출 것인가, 사람의 생각과 문화에 기술을 맞출 것인지의 문제다. 디지털 세상의 권력 구조를 인간화하기 위한 실마리가 잊혀질 권리가 될 수 있다."

김현주 기자 kimhju@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