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는 제목으로 번역된 'Men explain things to me'에서 리베카 솔닛은 남성이 여성들에게 설명하려는 경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성은 가랑이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어조를 기대했는데 꼭 그 근처 어딘가를 걷어차인 것 같이 아프다. 찌릿한 고통과 함께 밑줄을 쫙 그었다. 흔한 랩 가사들보다 훨씬 '힙합답다'. 어지간한 래퍼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스웨그(Swag)다.
그러고 보니 힙합이 꼭 음악만인 것은 아니었다. 2016년 한국이라면 힙합은 그저 길거리 춤이고 음악인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이전에 힙합은 사회를 보는 프레임이었고 문화였으며, 사회 운동이었다.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시합에 출장한 재키 로빈슨은 은퇴 후 인종통합을 목표로 왕성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블랙 무슬림인 맬컴 엑스와 손을 잡은 파웰을 이렇게 비난했다. "당신은 흑인이 지금까지 싸워온 길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맬컴 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뉴욕 암스테르담 뉴스' 지면은 로빈슨의 공개서한과 함께 이를 반박하는 맬컴 엑스의 글도 실었다. "당신은 흑인으로부터 얻은 지지에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백인의 후원자들에게는 한껏 진심을 보여주고 있다." 최악의 인종 차별을 경험했던 두 사람은 인종차별 문제를 두고 뚜렷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흑인 인권의 신장이었다. 진정 음악을 하지 않고도 힙합을 했던 사람들이다.
(사진 = 맬컴 엑스와 재키 로빈슨)
YG엔터테인먼트는 그 존재만으로 힙합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대형 연예 기획사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YG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 활동했던 양현석이 이른 바 '블랙뮤직 아티스트 양성'을 지향하며 만든 회사다. 블랙 뮤직은 말 그대로 R&B, 힙합 등 흑인 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 장르를 말한다. 1996년 '현기획'으로 출발한 YG는 98년 '양군기획'으로 이름을 바꾸며 힙합 음악만을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후 YG 엔터테인먼트가 정식 출범했다. 1TYM과 지누션이 힙합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에픽하이도 YG와 계약했다. 이 쯤 되면 음악만 놓고 보았을 때 YG 소속 뮤지션들에게 '힙합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진 = YG엔터테인먼트)
언더 래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돌 그룹의 힙합도 '힙합'이냐는 의문 때문이었다. 청춘을 바쳐 힙합 씬을 지켜 온 언더 래퍼들의 의문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언더 래퍼와 아이돌 래퍼는 서로가 힙합의 주인이라며 가는 길마다 맞붙어 싸웠다. 언더 래퍼들은 스스로 한국 힙합의 자존심인 양 아이돌 래퍼들을 무시했다. 역설적인 것은 그중 몇몇은 스스로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1TYM'을 보며 힙합을 시작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언더 래퍼들의 비난에 기분이 상한 아이돌 래퍼들은 "우리도 힙합"이라며 마이크를 잡았다. 바비와 비아이, 송민호와 지코는 성공한 축에 속한다. 센 척 하느라 아이돌 이미지까지 버리고 만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힙합의 주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랩이 가난한 게토 출신 흑인들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을 때, 백인 중산층 출신 래퍼가 그래미 어워드에서 13번이나 수상했다. 아카데미 어워드에서도 래퍼로는 처음으로 상을 탔으며, 힙합 역사상 가장 높은 앨범 첫 주 판매량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바로 영화 '8마일'의 주인공 에미넴이다.
요컨대 "누가 진짜 힙합이냐"거나 "힙합의 주인이 누구냐"는 질문은 틀렸다. 주인은 그 문화를 어떤 방식으로든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다. JTBC에서 '힙합의 민족'을 방영했을 때, 무대 위에 올랐던 이른 바 '할미넴'들 역시 그 순간만큼은 힙합이다. 그런데 아이돌 래퍼라고 해서 힙합의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돌 래퍼뿐만 아니라 누구든 랩을 하면 래퍼다. 화장을 짙게 하고 춤을 추며 윙크를 날리면 아이돌 그룹일 뿐. 7일과 8일 자정 잇따라 발표한 바비의 '꽐라', 송민호의 '몸'도 힙합은 힙합이다. 적어도 그들은 랩을 통해 음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음악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랩을 잘 한다고 다 힙합이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14년 '쇼미더머니 3'에 출연한 올티가 그러지 않았던가, "저들(바비와 비아이)은 지금은 힙합인 척 해도 어차피 방송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서 아이돌 활동을 할 사람들"이라고. 음악이 힙합인 것과, 정신이 힙합인 것은 별개다. 단순히 랩을 한다는 것만으로 "내가 힙합이다" "니가 힙합이다"며 지난한 싸움을 이어갔다간 무덤 속 재키 로빈슨이 다시 야구 방망이를 들 것이다. 많이 양보해도 리베카 솔닛에게 급소를 세게 맞을 일이다. 신동욱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