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일전쟁부터 아관파천까지
- 난세 속 총리대신직 4번 역임
- 일본 근대화 조선에 전파하려다
- 친일 매국노 꼬리표 따라붙어
- 격살·시신 훼손 등 비참한 최후
- 조선정치가의 '애국적 친일'해석
김홍집(1842~1896년)은 친일파인가 비운의 개혁 관료인가. 이 책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의 삶을 재조명한다. 김홍집은 청일전쟁, 갑오경장, 동학봉기,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조선의 근대화를 주도한 개혁 관료이다. 하지만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으로부터 시신이 훼손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친일 매국노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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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비운의 개혁 관료 김홍집. |
저자는 난세를 살다간 조선 최고의 정치외교가로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다.김홍집은 광양현감을 거쳐 예조 참의로 있던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임명돼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다. 1개월 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그는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피고 돌아온 뒤 인천 개항장 지정,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요구했던 일로, 그가 '친일'로 분류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이완용이나 이범진처럼 일신의 영달이나 부귀영화를 위한 '매국적 친일'이 아니라 개화한 일본을 롤모델로 삼아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애국적 친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김홍집은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했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의 격동기에 무려 네 차례나 총리직에 올랐다. 이를 두고 자리에만 연연한 친일파가 아니냐는 눈초리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세기 말 동학 혁명 때 한심한 조선 정부는 청국에 다시 지원 요청을 했으나 당시 좌의정 김홍집은 강하게 반대하는 소신을 발휘했다. 천인공노할 민비시해(을미사변)가 발생하자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 결심까지 했으나 그의 정치적 동지 유길준의 만류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 후 그에 대한 포살령이 내리자 유길준 등 동지들은 그의 안전을 걱정하고 피신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홍집은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라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호송 가마에 올랐다.
망국의 길에서 그의 길은 고독했다. 그 고독과 절망의 심연을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순조 이후 조선왕조의 부끄러운 민낯을 들춰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민낯을 자조와 자학으로 곱씹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아픈 과거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랑스러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일념에서 쓴 기록이다"고 저술 취지를 밝혔다. 신수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