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서 태어난 재일시인 김시종
- 식민지 역사가 할퀸 상처에 고통
- 8·15 해방과 제주 4·3 사건 중심
- 긴 세월 묻어뒀던 이야기 풀어내

재일시인 김시종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소년 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에서 보냈다.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는 김시종이 아흔 가까운 생에 처음으로 풀어낸 자서전이다. 책의 중심에는 '황국소년'으로 맞이한 8·15 해방과 제주 4·3사건이 두 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해방 전까지 김시종은 일제의 황민화 교육이 길러낸 '제국의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일본 동요와 군가에 흠뻑 빠졌으며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지 않는 부모를 답답해했고, 군사병 학교에 지원해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그런 그가 열일곱 살이었던 1945년 한여름에 겪은 '해방'은 결코 반가운 사건이 아니었다.

김시종을 그날의 자신을 "정확히는 '해방'에 엄습당한 나"라고 회상한다. "정말이지 하늘이 뒤집히는 충격이었습니다. 그토록 나는 자기 나라에, 동포민족에 무지했을 뿐더러 자기 나라 문자인 한글은 아야어여의 아 하나 적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젊은이였습니다." 그에게 일본어란 감성과 사고체계를 길러낸 정다운 모국어이자 '국어'로서 강제된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였다.

번역가 윤여일(왼쪽) 씨와 저자 김시종 씨. 일본 류큐대 오세종 교수 제공

해방 후 그는 조국의 현실과 사회의식에 눈을 떠 민족의 말과 글, 문학을 왕성하게 배워나갔다. 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학생운동과 남로당 활동에 투신하는 등 사상적 전환을 겪는다. 그러다 4·3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갔다. 4·3사건은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점령통치에 반대하는 1948년 4월 3일 제주 주민 무장봉기로 본격화 돼 약 6년 반에 걸쳐 일어났다. 제주도 전체 인구 약 28만 명 중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참사로 기록됐다.

그는 당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활동에 가담했고, 한창 4·3사건이 벌어지던 시기에 제주 성내에서 연락활동에 종사했다. 1년여간 숨어 지내던 그는 1949년 5월 부모를 남겨두고 학살의 광풍을 피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김시종은 불과 7년 전까지도 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조차 숨김없이 털어놓지 못했다. 자신이 남로당 당원으로 참가했다는 이야기가 자칫 4·3사건을 '공산 폭동'이라 강변하는 미군정과 군사정권의 논리에 동원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 불법입국했다는 자백을 함으로써 남한의 군사정권으로 강제송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한다.

저자는 긴 세월 가슴에 묻어둔 기억을 일본의 월간지 '도서'에 3년간(2011년 6월부터 2014년 9월) 연재했다. 이를 엮은 책이 지난해 12월 제42회 '오사라기 지로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는 아사히신문사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탁월한 산문작품을 가려 수여하는 상이다. 출판사 돌베개는 김시종의 일본어를 다시 한국어로 제대로 옮기기 위해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의 대응을 각별히 고민해 여러 세대 한국어 화자의 검토를 거치는 등 신중을 기했다.

김시종은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직후인 1998년 49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를 방문했다. 이후 1년에 한두 번 부모 묘소에 성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삼십 년에 걸쳐 민중이 싸워낸 민주화투쟁이 여물어 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손을 모아 감사하고 있다"고 적었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남한도 북조선도, 어느 한 쪽 온전히 정치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채 '재일'이란 이름으로 식민지 종주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시종.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그의 생생한 회상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