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의 중요한 연례 프로그램으로 대표되는 '월드 시네마'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영화사의 위대한 감독들의 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감독전이 매해 특별 섹션으로 포함되곤 하는데 올해는 프랑스의 감독 자크 베케르가 주인공이다. 거의 전작에 해당하는 그의 장편영화 11편이 상영 중이다.

베케르는 프랑스의 또 다른 명감독 장 르누아르의 동료이자 후배였다. 그들의 우정은 다소 '지나칠 정도여서…, 전혀 엉뚱한 관계(?)로 의심받았을'만한 사이였다. 1932년부터 8년간 베케르는 르누아르의 영화의 조감독을 맡곤 했는데 이 말은 르누아르의 명작들, 즉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위대한 환상' '라 마르세예즈' 등을 함께 만들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베케르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1960년 2월21일). 그의 영화를 숭배해 마지않았던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베케르의 사후 1년이 지난 즈음 그에 관하여 쓴 짧은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그 자신의 템포를 발명했다. 그는 빠른 자동차들과 느린 저녁 식사를 사랑했다. 그는 정말이지 단지 15분이면 될 만한 주제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찍었다." 각본이 영화를 좌지우지 하는 프랑스 영화의 각본주의가 영화를 망친다고 격론을 토해냈던 트뤼포에게 이런 표현은 격찬 중의 격찬에 속한다. 베케르의 영화가 최상의 템포와 리듬의 영화라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한편 베케르의 애칭은 '영화의 정비공'이었다고도 한다. 묵묵하게 나사를 조이고 기름칠을 하며 일하는 어느 성실한 정비공처럼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 자체에 몰두하면서 기쁨을 느낀 사람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베케르의 것들이 대개 그가 발명한 템포 혹은 그것의 놀랄만한 정지 혹은 그것의 갑작스러운 비약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과 앙투아네트'에서 갑자기 모든 쇼트를 뛰어 넘어서 앙투안의 시선을 가득 채우는 앙투아네트의 저 귀의 두 번의 클로즈업(왜 눈이나 입술이 아니었을까), '에두아르와 카롤린'에서 카롤린을 향해 돌진하듯 다가섰다가 도망치듯 물러나는 트래킹에 의한 정면 쇼트와 거기 담긴 카롤린의 텅 비고도 순진무구한 자태, '몽파르나스의 연인'에서 취중 광기에 가득 차 폭력을 행사할 것 같은 화가 모딜리아니와 그런데도 그 앞에 사랑으로 버티고 있는 그의 연인의 기이한 긴장 구도.

어떤 영화들은 더 특별하다. 영화의 중반부 돌연 등장하는 장 가뱅의 나직한 독백. 외마디 비명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한 토막의 휘파람과도 같은 음악. 한편 '구멍'과 견주어야 할 것은 장르로서의 평범한 탈옥 영화들이 아니라 성스러운 탈출극인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이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몇 차례나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던가. 그리고 '황금투구'. 르누아르의 영화에 대한 존 포드의 반응을 흉내내보자. '황금 투구'의 어떤 쇼트가 아름다운가. 아니, 어떤 쇼트가 아니라 모든 쇼트. 어떻게 모든 쇼트가 저토록 불길하면서도 동시에 아늑할 수 있는가, 나는 아득했다.

어떤 영화를 보면 쓸모없는 생각이라도 그 생각이 멈춰 지질 않는다. 또 어떤 영화는 모자란 글이라도 쓰기를 멈추고 싶질 않다. 베케르의 영화는 그냥 보는 것을 멈추고 싶질 않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