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지금의 이야기' 공연 장면. 극단 고춧가루부대 제공

- 배우 20명 화려한 합창과 군무
- 방황하는 10대의 삶 잘 녹여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전날 같은 시간 원로 연극인들이 만든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본지 22일 자 21면 보도)를 본 뒤 21일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지금의 이야기'(이하 지금의 이야기)를 보니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채색의 어두운 무대 위에 오랫동안 중력의 힘을 받은 얼굴을 가진 배우가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연기하는 연극이다. 그 속엔 인생의, 연극의 묵직함이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든 것이 그 대척점에 있다고 보면 된다. 다음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지금의 이야기는 분명 서툴다. 프로 뮤지컬 배우에 비한다면 아직 성량도, 가창력도 여물지 못했다. 특히 배우가 혼자 노래하는 장면이 등장하면 그들의 그 떨림이 고스란히 객석에 전해진다. 관객 입장에서 배우가 걱정될 정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뭉치면 힘을 발휘한다. 20여 명의 배우가 합창하고 군무를 추면, 그들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든든한 동료가 된다. 배우들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에너지를 무대 위에 쏟아내고, 객석을 휘어잡는다. 엄청난 연습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화려한 군무 장면이 6번 정도 등장한다.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을 접목한 연출의 장기도 여기서 빛난다.

제목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관객을 끌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이 작품은 사랑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400년 전 10대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늘날의 청소년으로 재해석했다. 몬테규와 캐플릿가의 대립을 노래 오디션, 학교 폭력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고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는 가면 무도회 역시 서울 홍대 클럽 분위기로 그렸다.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것은 극단 고춧가루부대의 대표이자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안준영(31) 연출의 의도다. 그는 2012년 극단을 창단하며 '세상의 편견에 뿌리는 고춧가루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청소년 대상 '교육 연극'을 주로 해온 안 연출은 "입시경쟁에서 원치 않는 경쟁을 해야 하는 10대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마지막 합창이 극장을 가득 채운다. "나의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세상의 무대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래, 너희에겐 해운대 백사장 모래알처럼 아주 많은 날이 남아있단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할아버지 배우들이 이들의 노래를 듣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17~28일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7시 일요일 3시 부산 연제구 거제동 한결아트홀. 균일 2만 원. 문의 1588-9155

박지현 기자 anyway@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