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수북히 쌓인 금정산. 국제신문DB

해가 바뀌면서 몇 해 전 읽었던 '아프니깐 청춘이다'를 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아파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자꾸 생각나더군요. 많이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살아오면서 온실 속 화초처럼 살기보다는 거센 비바람 부는 들녘의 삶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축물을 지을 때도 평지에 짓는 집보다 험하고 가파른 곳에 지어서 더 멋진 건축물 모습을 볼 때가 많지요.

자연의 이치 또한 그러하지요. 찬 겨울날의 시간이 많을수록 봄꽃 향기는 더욱 진하게 다가오니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일도 때로 찬바람 불고 눈, 비 내렸다가도 어느새 봄날이 왔을 때 사람의 옥석(玉石)을 가릴 수 있다 하지요. 명절이 오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일을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지인이 하는 말이 "올 한 해는 사람과 거리를 잘 둬야 되겠다"였습니다. 사람과 거리를 생각했습니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는 말처럼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장자 달생(達生)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발을 잊은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은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며 마음에 시비를 잊은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꼭 맞는 일과 사람이 얼마만큼 있을까요? 맞추면서 그렇게 맞춰가는 듯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살면서 가끔 하게 되는 '오해'보다 거기서 숫자 몇 개를 뺀 '이해'라는 단어를 쓰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한숨 돌리고 상대를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고 그 작은 이해들이 우리 삶을 조금 풍요롭게 하는 일일 겁니다.

일본의 양관 선사는 수행자로서 인욕 행(行)을 잘하신 분으로 알려졌는데요. 속가에서 장남이었던 스님에게 남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에게도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죠. 이 양자가 말썽을 많이 부렸나 봅니다. 어느 날 문중 사람들이 모여 양자를 가문에서 파양시키기 위해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양관 선사도 그 집안의 어른으로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함께합니다. 문중 어른들이 말썽 많은 양자를 두고 비난하지만, 양관 선사는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끝날 무렵 이제 절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면서 툇마루로 나가 신발을 신으려 하자 말썽 많이 피운 양자가 자신에게 아무런 비난의 말을 하지 않은 양관 선사가 고마워 스님의 짚신 끈을 매어드리려 하는데 양자의 손등으로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위를 보니 양관 선사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뒤 양자는 그릇된 행동을 고치고 착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상대를 걱정하고 연민하는 것은 굳어진 그릇됨도 고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가끔은 소리 내어 상대를 탓하고 그릇됨을 지적하기보다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연민해주는 것이 각자의 잘못됨을 환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침묵 속에 담긴 가르침이 백 마디 말보다도 큰 효과를 부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한 해는 말없이 묵묵하게 봐 주는 어른의 눈빛을 만나고 싶고, 저 또한 그런 눈빛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설날입니다.

대운사 주지·복합문화공간 쿠무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