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하는 각본가 아론 소킨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잡스에 대한 경외나 관심이 없다. 우연히 손에 들어 온 두툼한 잡스 전기도 옆에 있던 후배에게 치우듯이 던져 주었던 기억이 난다. IT 분야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나는 설령 내가 은연 중 잡스에게 빚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내세우기로는 그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이 분야의 위대한 선구자 잡스가 내게는 위인의 모델이 아니다.

각본가 소킨에게도 잡스는 그다지 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소킨은 잡스의 위대함을 표현할 때 빼놓기 어려운 것을 고의적으로 빼놓고 각본을 썼다. 영화에는 그 유명한 잡스의 프리젠테이션 장면들이 제외됐다. 영화는 세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1984년, 1988년, 1998년 런칭 행사 직전의 리허설 상황이다. 그리고 세 덩어리 모두 잡스가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끝난다. 위인 잡스를 표현할 때 유용한 가장 보편적인 대중 기호를 삭제한 것이다.

미국 영화에는 위인과 그의 연설 장면이라는 전통이 존재한다. 그 연설은 법정 영화의 장르적 틀을 빌려서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 영웅적 변론의 형태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소시민의 거칠지만 감동적인 길거리 호소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소킨이 프리젠테이션 장면을 제외했을 때 그건 연설이라는 위인의 퍼포먼스를 그리고 그 퍼포먼스로 성취될 위인의 성격을 제외한 것이다.

연설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은밀하게 한 번은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잡스가 오로지 딸 리사만을 청중으로 두고 하는, 부성애 가득한 옥상에서의 비공개 연설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지루하다. 영화가 내내 활력 있게 강조했던 그의 결함과 단점을 그의 위대한 성취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당연한 과정으로 이내 결부시켜 버리는 상투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 번의 리허설 중 첫 번째 리허설 장면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이 장면은 전적으로 잡스라는 공인된 위인의 잘 말해지지 않은 단점을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저런 녀석이라면 아무리 천재라도 함께 일하고 싶지 않겠다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이 장면의 핵심이다. 잡스의 맹렬한 성취욕에 동거하고 있는 잔인하면서도 기만적인 인간성을 영화는 마치 고자질하거나 폭로하는 것처럼 드러냄으로써 긴장감을 조성한다. 여기에는 어떤 꾸밈도 옹호도 없어서 오히려 활력이 넘친다.

이 영화의 잡스처럼 재수 없는 천재를 소킨이 각본을 썼던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본 적이 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결국 '소셜 네트워크'를 본 주커버그는 자신이 파렴치하고 치졸하게 그려졌다는 이유로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잡스가 '스티브 잡스'를 보았다면 그의 반응도 비슷했을 것이다. 소킨이 써낸 것은 위인 잡스와 그의 위대한 나날들의 전기가 아니라 말썽꾼 잡스와 그의 불화의 나날들의 전기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엄숙하거나 순진하거나 순응적인 전기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비범한 각본가 소킨은 '소셜 네트워크', '머니볼', '스티브 잡스'로'불화의 전기'라는 새로운 연작을 써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고 나서 그 주인공의 모든 것에 동화된다면 그건 그의 성서이거나 그의 광고에 가까울 것이지 전기는 아닐 것이다. 전기란, 보고 나서 그 주인공에 관하여 조금 더 궁금해져야 맞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지속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나는 잡스가 조금 궁금해졌다. 이 영화는 보길 잘한 것 같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