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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쥐 /강이라

뭉쳐 던진 양말 같기도 하고 때타월 같기도 했다

그것은 몸집이 아주 작은 긴 꼬리를 가진 쥐였다

수진은 다시금 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한동안 꼬리가 잘린 쥐가 궁금했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2-31 18:59:04
  •  |  본지 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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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분째였다. 수진은 욕실 앞에 엎어져 있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머리는 바닥에 처박은 채였다. 꺽꺽, 마른 울음이 목구멍을 할퀴며 넘어왔다. 바짝바짝 침이 말랐다. 풀썩 꺾인 무릎으로 타박의 고통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욕실용 슬리퍼가 발가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전 세입자가 버리고 간 누런 아이보리색 슬리퍼의 지압용 돌기마다 거무스름한 물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나머지 한 짝은 보이지 않았다. 목이 잔뜩 늘어난 양말이 발바닥까지 밀려 내려가 있었다. 허옇게 튼 뒤꿈치가 앙상하게 도드라졌다. 발목이 선듯했다. 냉기가 온몸으로 번져 올랐다.

그것은 쥐였다. 사과 씨처럼 작고 까만 눈을 가진 잿빛 털의 새끼 쥐였다. 그렇다고 큰 귀가 사랑스러운 미키, 미니 마우스는 아니었다. 어수룩한 톰을 괴롭히는 앙큼한 제리도 아니었다. 해묵은 기름기가 켜켜이 앉은 중화반점 환기통을 요리조리 쑤시고 다니며 살모넬라균을 옮기고 몸통을 채 보기도 전에 긴 꼬리의 흔적만 남기고 날쌔게 내빼버리는, 이름 그대로 시궁쥐였다. 어릴 적 수챗구멍 바깥으로 삐죽이 나온 꼬리를 고무줄인 줄 알고 잡아당기다 까무러치게 놀란 뒤로 수진은 쥐 소리만 들어도 기겁을 했다. 그 쥐가 저기, 욕실에 있었다. 욕조 가득한 물 위로 노랑 바가지를 타고 표류하고 있었다. 바가지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뒤집힐지도 몰랐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수진은 바닥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실핀 하나가 덜렁거렸다. 나이 들어 보이는 긴 얼굴이 싫어 늘 내리는 앞머리지만 집에서는 그러모아 바투 핀을 꽂았다. 뻗친 앞머리를 손으로 잡아 내리며 코끝에 기우뚱하게 매달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이내 눈앞이 우윳빛으로 부예졌다. 엎어지며 그대로 손등 위로 얼굴을 뭉갠 탓이다. 얼룩진 렌즈 너머로 오후의 잔 볕이 먼지처럼 부유했다.

쾅쾅쾅.

"401호!"

쾅쾅.

"401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웃풍을 따라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고기압의 북풍처럼 냉랭한 소리였다. 아줌마가 401호, 401호 하고 부를 때마다 수진은 마치 자신의 방 번호가 죄수 번호라도 되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401호 거기 있어? 거기 있지? 열어, 문."

녹슨 철문이 덜컹거렸다. 마구잡이로 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문짝을 통째로 뜯어낼 기세였다. 썩은 이마냥 옥탑방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올여름까지만 해도 수진은 같은 건물의 2층 원룸에 살고 있었다.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원룸은 깨끗하고 넓었다. 볕도 잘 들고 웃풍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쉬게 되면서 비싼 월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월세가 15만 원이 더 싼 지금의 옥탑방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오 개월 전의 일이었다.

주인아줌마는 1층에서 건강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배와 양파를 달이는 들큰한 냄새와 흑염소의 누린내가 뒤섞여 바람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왔다. 그 때마다 수진은 건물 전체가 덜 말린 한 마리 생선처럼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이면 수진은 늘 자신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곤 했다.

"쥐, 쥐가요…."

"모라고? 쥐?"

"욕실에, 아니 욕조에, 그러니까 바가지에…."

"뭐래니? 도대체 쥐가 뭐? 답답해 죽겠네. 열어, 당장!"

일어서려다 수진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오른발 뒤꿈치부터 찌르르 다리가 저려왔다. 왼발을 목발처럼 딛고 오른발을 질질 끌며 몇 발짝 떼자마자 다시 문이 덜컹거렸다. 바닥을 긁어대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삐거덕거렸다. 아귀가 맞지 않아 뒤틀린 문짝은 서너 번을 더 흔들리고 나서야 훨쩍 열렸다.

"왜 이러니, 문? 별게 다 신경을 건드리네."

아줌마의 신경질적인 발길질에 문짝이 뭇매를 맞았다.

"작년엔 안 이랬다. 고쳐놓고 나가."

확인 사살하듯 아줌마는 정확한 손가락질로 문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서서는 다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수진을 바라봤다.

"그게요… 쥐가, 이상하게도…."

"어딨어, 쥐?"

수진이 대답도 하기 전에 아줌마는 신발을 신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섰다. 철문만이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지을 뿐 현관과 방의 경계는 애매했다. 대학 졸업 선물로 엄마가 사준 낡은 정장 구두 한 켤레와 세 줄 슬리퍼, 뒤축이 반쯤은 무너져 내린 운동화 두 짝이 놓인 자리가 그대로 현관이었다. 방을 옮긴 첫날 신발을 밖에 벗어뒀다가 비에 젖어 낭패를 본 뒤로는 문 안쪽에 욕실용 발판을 깔고 현관 대신으로 사용하였다. 아줌마는 성큼성큼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세 걸음이 전부지만 딛는 자리마다 신발 도장이 꾹꾹 찍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신발 밑창에 묽은 종이풀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꼴랑 300뿐인 보증금에. 고것마저 방세로 알뜰히 까먹고 있는데. 쥐까지 잡아 달라 하고. 아이고야. 염치없다. 그치?"

방안을 휘 둘러보던 아줌마가 억지 동의를 구하듯 수진을 말끄러미 쳐다봤다. 수진은 땡감을 씹어 삼킨 듯 입이 떫었다.

"어라. 안 열리잖아. 잠긴 거야?"

아줌마가 이번엔 욕실 손잡이를 흔들어댔다. 누렇고 동그란 욕실 손잡이를 아무리 좌우로 돌리고 앞뒤로 당기고 밀어도 욕실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안이 텅텅 울렸다. 수진이 돌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잠근 기억은 없었다. 놀라 뛰쳐나오며 그만 잠금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왜 이러니 정말? 401호야. 401호야."

아줌마는 분을 꾹꾹 눌러 담아 냉기 가득한 얼굴로 수진을 향해 분연히 돌아섰다. 앙다문 입술 끝으로 억지웃음이 진물처럼 흘렀다.

"좋아 좋아. 괜찮아. 잡으면 돼. 그 전에 방을 빼든가 방세를 내든가. 오케이?"

그럼 씻는 거는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수진은 꿀꺽 말을 삼켰다.

"그럼, 쥐는요? 오도 가도 못하고 물 한가운데 둥둥 …."

아줌마의 얼굴이 수진의 코앞으로 쑥 들어왔다. 수진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빛이 스미지 못한 천정 구석으로 실핏줄처럼 뻗어 나간 거미줄이 보였다.

"지금 쥐새끼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아줌마는 문턱에 신발 뒤축을 툭툭 쳐댔다. 이제야 털다니. 오고간 발자국들이 수진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돋았다. 아줌마가 가자미눈으로 정장 차림의 수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401호. 오늘 면접 봤어?"

시선은 삐딱했고 말투는 못마땅했다.

"한 해 마지막 날에도 면접 보는 데가 있다니? 그런 회산 안 봐도 비디오야. 맨날 면접만 보면 뭐한다니. 공부도 잘했다며? 어쨌든, 401호야. 취업이든 월세든 성의를 보이자. 응?"

혀를 끌끌, 두 손은 탈탈. 아줌마의 제스처는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좁은 옥상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아줌마는 계단참으로 사라졌다. 수진은 발등에 발바닥을 포갰다. 냉기 위로 미지근한 온기가 포개졌다. 스커트 아래로 살구색 스타킹이 느슨했다. 본연의 탄성을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왼쪽 뒤꿈치는 스타킹 밖으로 작은 구멍까지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 구멍은 아직 구두 안에 숨어 있었다. 코가 더 나가지 않도록 딱풀을 발라주면 그럭저럭 두세 번은 더 신을 수 있었다. 남색 재킷의 소매는 이미 날깃날깃하다. 두 번이나 시접을 올려 수선한 탓에 소매 단은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재킷의 팔꿈치는 혹처럼 튀어나왔고 스커트의 골반 부위는 반질거렸다. 졸업을 앞두고 처음 지원한 대기업 인턴십에 합격했을 때 엄마가 사준 정장이었다. 엄마는 비상금을 털어 수진에게 정장 세 벌을 사 입혔다. 인턴은 정규직 전환이 가능한 계약직일 뿐이라고 수진이 알기 쉽게 말해줬지만, 엄마는 무심히 흘려들었다. 수진 또한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새내기로서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지레 엄마의 기대를 꺾고 싶지 않았다. 수진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낡은 정장이 허물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진은 재킷과 스커트를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고는 페브리즈를 꼼꼼히 뿌렸다.



옥탑방은 특이한 구조로 방보다 욕실이 더 컸다. 마치 욕실부터 만들고 남는 자리에 방을 욱여넣은 모양새였다. 욕실에는 세탁기도 들어가고 선반형 거울이 달린 세면대도 들어가고 옥탑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욕조까지 너끈히 들어갔다. 바랜 핑크빛의 욕조는 쓸데없이 깊고 넓었다. 수진이 두 발 뻗고 누워도 충분할 정도의 사이즈였다. 계절이 바뀔 때 이불 빨래용으로 한 번 썼을 뿐 욕조 안에는 세제와 변기 솔 그리고 롤 화장지같이…치우기 애매한 자질구레한 것들로 가득했다.

이틀 전이었다. 옥상 출입이 거의 없던 주인아저씨가 오후 늦게 올라와서는 얼른 수도밸브부터 열라고 닦달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추위가 온다는 뉴스를 봤으니 수도관이 통째로 얼어붙기 전에 물부터 쫄쫄 흘리라는 것이었다. 윗집 처자에 대한 걱정과 배려라기보단 동파 사고의 번거로운 수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옥상이 얼면 1층까지 골치 아파진단 말도 빼먹지 않았다.

그냥 흘려버리기는 아까워 욕조를 비우고 물을 틀었다. 수진은 동파보다 물세가 더 걱정이었다. 반나절이 지나 욕조 가득 물이 차오르자 잠가버렸다. 수도가 언다 한들 욕조물로 버티다 보면 저절로 녹을 것이었다.

쥐, 쥐가 거기에 있었다. 밀실과도 같은 욕조 한가운데에 바가지를 뗏목처럼 타고 있었다. 몇 번 째인지 셀 수도 없는 면접을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눈 안 가득 가는 핏발이 섰다. 거의 잡아 뜯듯이 렌즈를 빼내자 시큰거리는 동통이 밀려왔다.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리고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에는 이미 겨울 최고의 한파가 와 있었다. 날숨을 따라 허연 콧김이 나왔다. 따가운 눈을 번갈아 감았다 뜨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는데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미간을 잔뜩 좁히며 거울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대충 뭉쳐 던진 양말 같기도 하고 갈색 때타월 같기도 했다. 수진은 선반장을 더듬어 안경을 찾았다.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대뇌가 상황을 인지하는 데 필요한 몇 초가 흐른 뒤 수진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것은 몸집이 아주 작고 재색의 긴 꼬리를 가진 쥐, 한 마리였다.



착신음이 떨어지고 한참이 지났다. 끊으려는데 딸깍 수신음이 들렸다.

"늦게 받네? … 내 번호 안 떠?"

"그냥… 보고 있었어."

저편에서 길고 연한 한숨이 무선을 타고 넘어왔다.

"… 왜?"

"언제부턴가 네 번호만 뜨면 심장이 두근거려. 빚쟁이도 아닌데 왜 이런다니."

"더하겠지… 빚쟁이보다…."

수진은 엄지손톱으로 나머지 네 손톱 밑을 꼭꼭 찔렀다. 긴장하거나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잘 있다가도 가끔 눈물이 쏟아져. 아빠는 나보고 갱년기라더라."

"갱년기는 무슨, 아빠는?"

"몰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 난 묻지도 않는다. 이번에도 말아 먹으면 그냥 오지 산골에 들어가 칡뿌리나 캐 먹고 살든가…."

엄마의 말끝으로 가느다란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작년에 폐경을 겪고 난 후로 부쩍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우리 첫째가, 우리 집 기둥이… 왜 이리 안 풀리는지 모르겠어, 엄마는…. 인턴인지 뭔지 한다고 1년 동안 밤낮없이 뛰어다녔는데도. 안 쓸 거면 뽑지나 말든가."

"요새 계약직이 다 글치 뭐…."

"거긴 그렇다 쳐도. 지난번은? 금융 인턴이라고 뽑아놓고는.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잖아. 근데, 근데 결국 어떻게 됐어? 보험만 열 몇 개 빼갔잖아. 점수에 반영한다고 해서 우리 식구 앞으로 든 것만 해도 몇 갠데. 그것뿐이야? 이모네며 작은 집이며, 한 다리 건너 친구까지…. 차마 또 잘렸다고 말을 못 해."

숨길 수 없는 한숨과 탄식과 흐느낌이 뒤섞여 들렸다.

"또 운다. 우리 엄마…."

"자랑스러운 우리 딸이었는데…. 공부도 잘해서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수진은 매운 코끝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맑은 콧물이 흘렀다.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연말인데 집에도 못 가고. 죄송해요."

"그래… 와봐야, 온들…."

엄마의 말끝이 흐려졌다. 수진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전화를 끊었다. 진짜 빚쟁이가 된 듯 당장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었다. 수챗구멍이라도 좋으니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꼬리까지 말아 넣고는 그저 반나절만 숨어있고 싶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수진은 폰을 내려다보았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밀린 월세며, 낡다 못해 닳아버린 정장이며, 뒤축이 꺾여버린 구두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쥐는 어떻게 잡는지에 대해서도…. 목구멍까지 그득그득 차오른 말들이 명치로 쓸려 내려가 그대로 체기가 되었다. 수진은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골목의 새벽은 소리로부터 온다. 멈칫거리며 골목을 훑는 쓰레기 수거차의 후진 멜로디 위로 배달용 오토바이의 달음박질 소리가 화음처럼 겹쳐든다. 소리는 밤을 거둬 간다. 날이 밝아오면 가로등은 홀로 멸할 것이다. 수진은 유리문 너머 골목 끝을 내다보았다. 새벽의 첫 배달 트럭이 올 시간이었다. 마감 30분 전인 수진에게는 마지막 입고였다. 아직 온기가 남은 삼각 김밥과 햄버거, 뽀송뽀송한 식빵의 결이 부드러운 샌드위치, 고슬고슬한 밥과 색색의 반찬들이 신선한 도시락들까지. 단 하루의 유통기한을 가진 먹거리들이 실려 올 것이다. 수진은 유통기한이 지난, 그래서 이제 곧 버려질 삼각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차가운 밥알들이 씹기도 전에 그대로 입안에서 흩어졌다. 레인지에 살짝 돌렸으면 좋았을걸. 입꼬리로 묻어나는 참치 마요 소스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수진은 입고 전표를 들여다보았다. 날짜가 지난 빵, 김밥, 샌드위치는 아르바이트생 몫이다. 먹어도 좋고 가져가도 좋다. 점장의 아량이라기보다는 편의점의 오랜 암묵적인 관습에 가까웠다. 겉은 멀쩡하고 맛도 그대로지만 더 이상 상품 가치는 없는 폐기 직전의 샌드위치.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것들을 꾸역꾸역 먹고 있으면 자신조차도 제 기한을 놓친 샌드위치가 된 것만 같아 수진은 우울했다.

정말 뭐든 하나요? 그럼요. 뒷조사는 빼고요. 흥신소는 아니니까요. 가격은 어떻게 하는데요? 일에 따라 달라요. 뭔데요? 그게… 쥐가 있어요.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해주세요 심부름센터'는 열려 있었다. 20분에 2만 원이요. 추가비용 있습니다. 너무 비싸……. 펩시를 채워 넣던 손에서 폰이 미끄러졌다. 앞치마 위로 떨어진 폰을 간신히 무릎으로 받아내 다시 귀에 갖다 대자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직접 잡으시든가.

쥐를 잡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본다. 연극 '쥐덫'이 떠올랐다. 크리스티가 영국 여왕의 생일 축하 선물로 쓴,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룬 희곡으로 그와 처음으로 봤던 연극이었다. 그날, 혜화동에도 연극 속 배경처럼 눈이 많이 내렸다. 둘은 손을 잡고 눈길을 걸어 가까운 서점으로 가 동명의 소설을 골랐다. 그리고 서로에게 해문출판사와 황금가지의 '쥐덫'을 선물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수진은 책꽂이 구석에 꽂혀있는 붉은 글씨의 '쥐덫'을 떠올리다가 머리를 흔들며 도구로서의 쥐덫으로 생각을 돌렸다. 쥐덫은 쥐를 잡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욕실 문 앞에 쥐덫을 놓은 뒤 문을 열고 쥐가 걸려들길 기다린다. 하지만 이미 쥐는 쥐덫에 걸려있지 않은가. 노랑 바가지 안에서 무게중심의 추를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을 쥐에게 얼른 뛰어나와 쥐덫 안으로 발 한쪽을 들이밀라고 할 수는 없다.

쥐 끈끈이는 소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긴 소매 옷과 빨간색 고무장갑으로 중무장한 후 철물점에서 구한 끈끈이를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어 든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욕조로 다가가 바가지 위로 끈끈이를 덮은 뒤 가운데를 꾹 누른다. 그러면 쥐의 머리나 등, 못해도 꼬리는 달라붙을 것이다. 빈 바가지로 쥐의 생포를 확인한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어쩌지.



사촌 오빠는 쥐를 보고도 수진처럼 놀라지 않았다. 수챗구멍 밖으로 나온 쥐꼬리를 한참이나 흥미롭게 지켜본 뒤 수진을 향해 검지와 중지를 펼쳐 들더니 두 손가락으로 싹둑싹둑 흉내를 냈다. 영문도 모른 채 수진은 냉큼 달려가서 반짇고리에서 가위를 꺼내왔다. 무겁고 투박한 옛날 가위였다. 사촌 오빠는 양손으로 가위를 V자로 벌린 채 수진을 향해 씩 웃더니 그것을 단번에 싹둑 잘랐다. 동시에 수진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제 꼬리가 잘려나간 듯 꼬리뼈가 화끈거렸다. 수진은 뒷걸음질 쳐 벽 모서리에 몸을 바짝 붙였다.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사촌 오빠는 한 손을 치켜들었다. 전리품인 양 오빠의 손끝에서 쥐꼬리가 덜렁거렸다. 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움켜쥔 손안에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날 밤 수진은 악몽을 꾸었다. 짙은 재색 비늘로 덮인 그것이 점점 길어지고 두꺼워지더니 마치 뱀 같이 바닥을 기기 시작한다. S자로 유영하듯 수진의 발치로 느릿느릿 다가오던 그것은 어느 순간 수진의 발목을 휘감는다. 털어내려 발버둥 칠수록 그것은 발목을 더더욱 깊이 옥죄어온다. 물먹은 채찍처럼….



우리 회사에 적합한 인재가 아닙니다. 다음 기회에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인원 보충이 끝났습니다, 다음 공고를 기다려주세요와 같은 많은 거절의 멘트가 문자와 전화로 며칠에 한 번씩 날아들었다. 미안하다, 아쉽다, 아깝다 등등 다양한 멘트로 둘러댔지만, 결론은 불합격이었고 탈락이었다. 아예 연락도 없는 회사도 많았다. 연락을 주겠다는 기한을 훌쩍 넘겼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수진은 매번 몇 번을 망설이다 확인 전화를 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직 연락이 없어서요라고 말하면 담당자에 따라 반응은 달랐다. 너무너무 미안한 목소리로 어쩌죠라고 말하며 되레 수진을 더 미안하게 만들기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연락 없으면 대충 눈치 채셔야죠라며 대놓고 퉁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무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진은 액정의 문자를 지우듯 문질렀다. 문자가 사라진 액정 위로 초췌한 얼굴이 비쳤다.



"또."

곱슬머리가 카운터를 툭툭 치며 수진을 향해 돌아섰다. 아침파트인 곱슬머리는 두 달 뒤 입대를 앞두고 있는 휴학생이었다. 밤 파트인 수진과는 석 달째 아침 8시마다 교대하면서 제법 친해져 있었다. 훈련소 들어갈 때까지 실컷 기르겠다던 반곱슬머리가 귀밑을 한참 넘어가 있었다. 쌀뜨물같이 멀건 얼굴에 외까풀의 눈과 작은 코가 쉽게 흐려지는 인상이었다. 돈 모아서 노르웨이로 떠날 거예요. 거기서 선박 기술을 배울 거구요. 내 배를 만드는 게 꿈이거든요. 인상과는 달리 말은 야무졌다. 곱슬머리는 다짐을 되새기며 고개까지 주억댔다. 수진은 작은 범선 한 척을 상상했다. 하얀 돛의 범선이 느리게 피오르드로 향한다. 타이가를 빠져나온 북해의 바람이 돛을 가볍게 부풀린다.




피오르드 깊숙이 미끄러지는 범선의 이물에 앉아 수진은 숲과 바다의 소실점을 바라본다. 노르웨이니까, 하루키를 읽고 비틀즈를 들어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나중에 놀러 와요. 게스트하우스도 할 거니까. 꿈과 이상의 갭이 적은 곱슬머리가 조금은 부러웠다.

"삑. 에러입니다."

곱슬머리가 바코드를 찍듯 수진의 이마에 스캐너를 갖다 댔다.

수진은 몸을 부르르 털며 도리질을 했다. 잡념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미안 미안. 왜, 왜?"

"또 모자라다고요."

"아, 얼마나?"

곱슬머리는 손가락 하나, 두 개를 차례로 펴 보였다.

"밤새 고생하고 돈은 빵꾸나고. 슬프다."

"자꾸 왜 그러지…."

"그러지 말고 낮으로 옮겨요. 지쳐요, 밤은."

수진은 앞치마 밑으로 손을 넣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꾸깃꾸깃한 종이 몇 장이 잡혔다. 구겨진 영수증 속에 천 원짜리 두 장이 섞여 있었다. 곱슬머리가 구겨진 천 원짜리 두 장을 집어 가더니 수진의 손바닥 위로 동전 4개를 톡 떨어뜨렸다. 정산이 맞지 않아 적게는 몇백 원, 많게는 오천 원에 가까운 돈을 메꿔 넣은 적이 가끔 있었다. 받은 현금을 숫자로 잘못 입력하면서 생기는 실수였다. 아는지 모르는지 거스름돈이 많다며 돌려주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수진은 앞치마를 벗어 곱슬머리에게 넘기고는 카운터 아래의 에코백을 꺼내 들었다. 화장품을 사고 받은 초록색 잎사귀가 그려진 천 가방이었다. 얄팍한 지갑을 열고 동전을 넣었다. 지갑에는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없었다.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일주일 단위로 직접 은행에 가 필요한 만큼 찾는 게 수진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틀 전 교통카드를 이만 원어치 채우고 동네 마트에서 선도저하상품인 감자 한 봉지와 양배추 반 통을 사느라 잔돈을 다 썼다. 은행에 들러 잔고를 확인하고 며칠을 버틸 얼마의 생활비를 찾아야 했다.

온수기에 물을 채우는 곱슬머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어둑한 아침이었다. 사위는 어두웠지만, 날은 포근했다. 오후에 눈 소식이 있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긴 잠을 자고 싶었다. 푸석한 감자를 삶아 으깬 다음 마요네즈와 설탕을 조금 넣어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야지. 에코백을 옮겨드는 순간 수진은 생각했다. 아, 따뜻한 물… 욕실… 그리고 쥐. 수진은 다시금 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르웨이에도 쥐가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곱슬머리는 이미 냉장실 뒤편에 들어가 있었다.



가득한 눈구름을 비집고 미지근한 아침볕이 인도 위로 늘어졌다. 볕자리의 눈들은 군데군데 녹아내렸지만, 대부분의 길은 한파에 얇은 빙판을 만들고 있었다. 더듬듯 걸어가 세 번째 정류장 앞에서 일일정보지를 꺼내 돌아서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허공을 붙잡아 제대로 서고 나니 식은땀이 흘렀다.

정류장으로 버스 서너 대가 줄지어 들어왔다.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빠르게 걷거나 달려서 빌딩 속으로 속속 사라졌다. 간혹 대열에서 빠져나와 푸드 트럭으로 달려가는 이들도 있지만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샌드위치를 입속에 구겨 넣고는 우물거리며 행렬 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미처 마시지 못한 커피를 성화처럼 들고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앞질러 나갔다. 빌딩가 정류장은 출퇴근 시간이면 사람들로 혼잡했지만, 방사형으로 퍼지며 각자의 위치로 신속히 떠나갔다. 바로 앞 기업 본사로, 왼쪽 두 번째 은행으로, 오른쪽 네 번째 증권회사로 아니면 횡단보도 건너 백화점으로. 슈트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거나 제복 위에 코트를 걸치고서. 왼쪽 일곱 번째 건물에 수진이 다니던 회사가 있었다. 6개월 전까지 수진은 매일 아침 이 정류장을 지나 출근했다. 보통은 지각을 면하기 위해 허겁지겁 뛰었지만, 아주 가끔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부리며 지날 때도 있었다. 인턴으로 1년을 다녔지만 정직 전환에는 실패했다. 오십 명 넘는 동기들 중 아무도 정직원이 되지 못했다. 얼마 후 인턴십의 허와 실을 고발하는 시사고발 프로그램 속에서 수진은 낯익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가장 많았던 남자 동기의 자살 소식도 함께 들었다.

수진은 정류장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늘어진 후드 티에 물 바랜 청바지, 지나치게 두툼해서 다소 둔해 보이는 파카 차림의 자신이 오늘따라 더 추레해 보였다. 사람들은 눈길이 전혀 미끄럽지 않은 듯 모두 씩씩하게 걸었다. 밑창이 닳지 않은 신발을 신어서일까. 힐을 신은 젊은 여자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수진의 앞을 지나쳤다. 빙판을 꼭꼭 쪼개며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수진은 경이롭게 바라봤다. 저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도대체 하이힐을 몇 년을 신어야 할까. 여자에게 힐의 높이는 경력과 자신감의 높이일지도 모른다고 수진은 생각했다.

통장 잔고는 가벼웠고 은행 ATM기는 야속했다. 돈 몇만 원 찾는데 출금 수수료까지 야무지게 떼었다. 사람들에 떠밀려 제일 가까운 타행 ATM 부스로 피신하듯 들어온 탓이었다. 두 블록 옆의 거래 은행으로 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수진은 유리문 너머의 분주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훑었다.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더라. 그동안 번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야, 이수진."

다행히 번호는 그대로였다. 쥐꼬리를 높이 들고 득의양양하던 사촌 오빠 모습이 떠올랐다. 재작년 가을, 결혼식에서 사촌 오빠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이모를 통해서 작년에 아들을 낳았고 얼마 전에 돌이 지났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왜 연락을 안 했냐고 수진이 묻자 사촌 오빠는 장인이 큰 수술을 받는 바람에 돌잔치는 생략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도 빡빡한데 돌잔치는 무슨. 민폐야'. 라고 말하며 사촌오빠는 허허거렸다.

"오빠. 지금도 공항에서 일해?"

"그럼. 딸린 식구가 둘인데 열심히 벌어야지. 그런데 수진이 넌 해외출장 안 다녀? 큰 회사는 나갈 일 많잖아."

사정을 들킨 것도 아닌데 얼굴이 먼저 벌게졌다. 엄마 말대로 친척들은 아직도 수진이 그 회사에 잘 다니는 거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진의 인턴 실적을 올려주기 위한 엄마의 강권에 못 이겨 이모가 오빠 이름으로 들어준 보험도 하나 있었다.

"나야 뭐…. 오빠는 어때? 공항서 일하면 좋겠다. 맨날 비행기도 보고."

수진은 얼른 말을 돌렸다.

"좋기는, 개뿔. 나, 비정규직이잖냐. 힘들어."

"아…."

사촌 오빠가 공항에 취업했다는 말에 당연히 수진은 정직원이라고 생각했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뭐, 비행기야 맨날 보긴 한다만. 보딩브리지 알지?"

"보딩브리지? 다리?"

수진은 되물었다.

"그, 게이트하고 비행기 사이에 놓는 다리 말이야. 탑승교."

"아, 탑승교."

"내가 하는 일이 그거거든. 공항 일이란 게 거의 다 비정규직이라고 보면 돼. 조만간 정규직 전환 걸고 파업 들어간다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내내 씩씩하던 사촌 오빠의 목소리가 반쯤 꺾여 있었다.

"아직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어 그런가. 내가 놓은 브리지를 건너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보고 있으면 기분 참 묘해진다. 감히 다다를 수 없는 곳으로 가는 무지개다리 같아서……. 공항엔 궁상이 없잖냐."

수진은 허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수많은 브리지를 놓는데 말야. 정작, 내 인생 브리지는 참 쉽지가 않네. 수진이 너처럼 진즉에 공부 좀 할 걸 그랬다. 넌 이런 거 잘 모르지?"

흐려지는 말끝으로 비행기 이착륙하는 소리가 거칠게 섞여들었다.

"수진아. 비행기 들어온다. 가봐야겠어. 출장 갈 때 꼭 연락해."

그래그래,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수진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제일 중요한 용건은 전하지도 못한 채였다.

'오빠. 계좌로 돈 조금 보낼게. 돌비 대신이야'.

메시지를 보내고 수진은 부스 밖으로 나왔다. 몇 분 사이에 길은 파장한 오일장처럼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들 걸음은 충분히 느려져 있었고 푸드 트럭은 입간판을 실으며 뜰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수진은 두 블록 옆의 거래 은행 ATM 부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진은 애기옷 한 벌의 적당한 값을 계산하다가 뒤늦게 놓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쥐를 잡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다른 골목의 고만고만한 높이의 주택 사이로 5층 고시원이 뿔처럼 솟아 있었다. 학원가나 고시촌에서 한참을 비켜나 위치한 덕에 이 근방서 가장 저렴한 방이라고 그가 말했다. 거기다 임용고시 합격자가 나온 방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나름 프리미엄까지 붙었다고 했다. 다행히 합격자가 고향 선배라 운 좋게 넘겨받았다며 올해는 시험 운이 좋을 거 같다고 입실하던 첫날 남자친구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어쩌면 운이 바닥난 방에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고 수진은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말하는 순간 남아있던 운마저 벽과 장판의 갈라진 틈으로 사라져버릴까 두려웠다. 잔존하는 운을 그러모아 그가 부디 수학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우울한 청춘의 진혼곡은 이제 그만 들어도 좋았다.

방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빨랫감은 잔뜩 쌓여 있었고 쓰레기통은 넘치기 직전이었다. 어쩌면 고인 시간의 냄새일지도 몰랐다. 창이 없는 이 방에선 시간과 날씨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옆방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초침이 있는 시계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2평도 채 못 되는 방은 싱글 침대와 책상만으로도 꽉 찼다. 산소포화도가 낮은 이 방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수진은 방바닥과 의자에 제멋대로 걸쳐진 옷들을 주워 행거에 걸었다. 가운데가 푹 꺼져버린 베개에서 그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빨랫감은 한데 모아 비닐에 넣고 묶었다.

'나 왔다 가. 올해 마지막 날이야. 내년엔 같이 보내면 좋겠다. 우리의 고군분투 청년기에 건배를. 미리 해피 뉴 이어'.

수진은 포스트잇을 스탠드에 붙이고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와 삼각 김밥이 서너 개 든 봉지를 문 안쪽 손잡이에 걸어두고는 방을 나갔다.

열쇠 구멍에는 억지로 쥐어짠 여드름 같은 상처만 잔뜩 남아 있었다. 수진이 든 드라이버의 끝도 마찬가지였다. 뾰족하고 매끄럽던 끝이 뭉툭해지고 뒤틀려 있었다. 빌려준 주인아줌마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열어야 했다. 십자드라이버도, 동전도 소용없었다. 아무리 돌리고 쑤셔 보아도 구멍 입구만 헤집을 뿐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발치로 드라이버를 던져 버리고 수진은 앞머리에 꽂은 실핀을 하나 뽑았다. 빈집털이범이 실핀을 이용해 쉽게 문을 따는 걸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수진은 검정 실핀을 브이자로 넓게 벌렸다. 그리고는 양 끝을 두 손으로 잡고는 실핀의 둥근 부분을 구멍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이밀었다. 덜그럭거리며 뭔가가 걸려들었다. 수진은 숨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핀을 천천히 돌렸다. 핀이 뒤틀리며 뭔가 돌아가는가 싶더니 이내 맥없이 풀려버렸다. 몇 번을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실핀 두 개로 동시에 열쇠 구멍의 아래위를 들쑤셔봐도 잠금쇠는 끄떡하지 않았다. 애꿎은 실핀만 검정 칠이 벗겨진 흉한 모습으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이제 남은 방법은 정말 하나밖에 없었다. 수진은 책꽂이를 뒤져서 플라스틱 파일 하나를 찾아냈다. 파일에는 작성하다 만 이력서 서너 장이 끼어 있었다.

반으로 접은 불투명 플라스틱 파일을 손잡이 안쪽으로 구기듯 억지로 밀어 넣었다. 헐거워진 문짝과 문틀 사이로 반달모양 잠금쇠가 보였다. 요즘의 문과 달리 옛날식 문은 조금만 애를 쓰면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어릴 적에 종종 문이 잠기면 아빠는 빳빳하고 얇은 플라스틱 책받침을 가져다가 잠금쇠 위쪽으로 쓱 밀어 넣었다. 그리곤 잠금쇠의 끝부분이 숨어있는 문틀 쪽으로 힘 있게 한 번에 베어내듯 내리그었다. 그렇게 서너 번 많게는 대여섯 번 반복하다 보면 항복하듯 문은 스르르 열렸다. 어린 수진은 연신 박수를 쳐대며 아빠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세우곤 했다. 수진은 파일을 조심스럽게 내리그었다. 힘이 약했는지 잠금쇠에 이르기도 전에 파일이 미끄러져 나왔다. 다시 파일을 잠금쇠까지 끌어내린 뒤 순간적인 힘으로 내리쳤지만 역시나 쑥 빠져나왔다. 힘보단 요령의 문제라는 건 알았지만 해본 적이 없으니 요령이 뭔지를 몰랐다. 이번엔 처음부터 힘으로, 다음엔 끝까지 약하게, 이렇게 저렇게 해 보아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진은 허리에 양손을 걸치고는 대결하듯 문을 바라봤다. 쉬운 게 하나도 없어. 좀 쉽게 쉽게, 그렇게 안 되나. 수진은 자신을 향해 있던 모든 문을 떠올렸다. 애초에 열린 문이 있었던가. 도대체 지금까지 몇 개의 문을 열었고 앞으로 몇 개의 문을 더 열어야 한단 말인가. 수진은 마치 자신의 앞으로 수천수만 개의 욕실문이 도미노처럼 늘어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화가 솟구쳤다. 에잇, 이까짓 문. 있는 힘껏 문짝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퍽.



그 후로 수진은 한동안 꼬리가 잘린 쥐가 궁금했다. 구불구불한 하수구 구멍은 잘 빠져나갔는지, 없어진 꼬리를 찾느라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다 음습한 어느 구석에서 그대로 죽은 건 아닌지. 수진은 제 꼬리가 떨어져 나간 듯 쓰라렸다. 평형을 유지하는 꼬리를 잃고 과연 그 쥐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을까.

쥐는 바가지 너머로 빼꼼히 수진을 쳐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작아 보였다. 아기 주먹만 한 몸통에 귀와 눈이 붙어있고 꼬리가 달려있었다. 쥐는 전의를 상실한 듯 한껏 꼬리를 말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쥐와 수진, 서로가 두 손 들고 항복을 외치는 꼴이었다. 마음을 다잡듯 큰 숨을 몰아쉬고는 랩을 씌우듯 바가지 위로 수건을 살포시 덮었다.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잡은 듯 수진은 조심스럽게 바가지를 들어 올렸다. 오금이 저리고 사타구니가 뻐근했다. 수진은 팔을 쭉 뻗어 바가지를 최대한 몸에서 멀리 떨어뜨린 채 욕실 밖으로 나갔다. 맘 같아선 그대로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오발탄처럼 엉뚱한 곳에 떨어지면 온 방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었다. 수진은 도둑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 새 자국 눈이 내려서 옥상 바닥은 갓 세탁한 침대 시트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날은 포근했고 바람은 잔잔했다. 해거름을 따라 구름은 한층 더 내려와 있었다. 조금씩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었다. 왼발을 뻗어 현관문을 닫았다. 여전히 문은 삐거덕거렸다. 수진은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가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송이 몇 개가 바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쥐는 미동도 없었다. 수진은 반대쪽 방향으로 수건을 반쯤 걷어냈다. 순간 훅하고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뒷걸음질로 물러나 한참을 기다렸다. 손끝이 시렸다. 수진은 파카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긴 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때 지난 크리스마스 캐럴이 멀리서 들려왔다. 수진은 저벅저벅 옥상 끝으로 걸어갔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발끝을 모아 세우고는 멀리 내다봤다. 골목을 돌아 일방통행로가 나 있고 그 끝으로 4차선이 뻗어 있었다. 모세혈관 같은 길을 따라 혈류처럼 눈발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종종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뒤로 발자국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수진은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작은 옥탑방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백열등 빛이 창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지근한 온기마저 그리운 저녁이었다. 수진이 어깨 위의 눈을 털며 바닥을 내려다봤을 때 눈 위로 가느다란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내달린 흔적이었다. 그 선은 옥상 구석의 배수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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