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에서 그 영화의 고유한 정서를 만들거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 행동이 기억에 남는다. 바로 걷는다는 행위다. 허우 샤오시엔의 인물들이 기찻길을 따라 걷는 장면은 아스라한 풍경의 샛길에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고향의 정취를 떠올린다. 소년은 이 길을 따라 성장했고 길을 떠남으로써 어른이 되어간다.
홍상수의 인물도 자주 걷는다. 수원에 하루 일찍 내려온 영화감독은 비어버린 하루 혹은 공짜로 주어진 하루를 보내기 위해 무작정 걷는다('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 움직임에는 목적이나 의미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걸음의 시간이 존재한다. 오승욱의 인물은 도시를 배회하면서 개발과 재개발로 구역화된 장소를 횡단한다. 돈에 쫓기고 피로에 찌든 그들의 육신이 발자국소리를 내면서 걸을 때 그 소리는 삭막하고 차가운 도시를 뚫고 나오는 비명처럼 들린다('무뢰한'). 사무엘 풀러는 군인들이 전투하는 장면보다 행군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아프리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이르기까지 줄곧 걸었던 그의 경험은 전쟁의 피폐함과 쇠약함, 그런데도 극한까지 버텨내는 인간의 한계와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걸음으로 대륙을 통과하고 적과 아군을 넘나들던 군인들은 걷는다는 행위만으로도 숭고함에 이른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산책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주 도시를 걷고 바캉스를 떠난 바닷가를 걷는다. 그들은 걸으면서 논쟁을 벌이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확인한다. 영화의 인물들이 특정한 장소를 천천히 걸으면서 눈으로 풍경을 좇을 때 관객들은 스크린에 펼쳐진 장소와 날씨, 그날의 기후까지 감지할 수 있다. 로메르는 경험으로의 산책과 일상적 행위로서의 산책을 통해 삶의 미세하고 변덕스러운 지점, 감정의 기복과 덧없는 표출까지 보여준다. 존 포드는 존 웨인과 헨리 폰다의 걷는 모습을 사랑했다. 군인, 선원, 서부의 사나이, 성직자건 그들의 걸음은 포드의 영화에 특유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약간 느릿하면서도 겅중거리는 헨리 폰다와 느리지만 둔중한 보폭을 지닌 존 웨인의 걸음이 서부의 마을, 2차 대전이 한창인 태평양의 섬, 멕시코의 시골길을 지날 때 그들의 육체가 딛고 지나간 길과 풍광이 곧 포드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킹 비더는 20세기 초 마천루를 이룬 대도시를 걸어가는 군중의 유동적인 걸음, 일정한 대열을 이루다가도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움직임을 통해 무성영화 최고의 운동을 표현했다('군중'). 또 흑인들이 맨발로 땅을 딛고 일궈나간 그들의 고된 노동의 시간과 그들의 삶의 근간인 노래와 종교적 감흥을 스크린에 새겨놓았다('할렐루야'). 공황기를 견디기 위해 모여든 공동체가 마른 땅에 물길을 대기 위해 곡괭이로 땅을 파고 다리를 만들고 손으로 흙을 파던 행렬은 그야말로 육신과 땀의 기록이 된다('일용할 양식').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또 있다. 버스터 키튼이 혼신을 다해 달려가는 모습이다. 그는 늘 뛰어서 스크린을 횡단했고 한번도 쉬지 않았다. 그가 달려가면 바위보다 큰 돌덩이가 비껴가고, 무리지어 쫓아오던 경찰들이 길을 잃는다. 그의 달리기는 영화라는 운동(혹은 운동으로서의 영화)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그의 제스처를 통해 영화에서만 가능한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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