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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5대10국시대 남당의 화가 고굉중이 그린 '한희재야연도' 중 첫째 장면과 둘째 장면(오른쪽부터). |
- 中 5대10국시대 남당의 왕 이욱
- 재상 지낸 한희재 은둔생활 염탐
- 화가인 고굉중에게 그려오게 해
- 다섯 장면으로 구성된 병풍그림
- 밤잔치 모습 사실적으로 묘사
- 흥겨움 속 텅빈 시선의 한희재 등
- 인물들 미묘한 심리까지 담아내
그는 왕조와 자신의 시대가 몰락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군주의 요구를 어길 수도 없지만, 하늘의 명운은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망명하기로 작정한다,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저 내면 속으로. 그것은 기이한 은둔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타락한다. 밤마다 향락의 밤잔치를 열었다. 남당시대 기인 한희재의 이야기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하염없는 나그네로다.
부평초 같은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야 그 얼마나 되리.
옛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에 놀았다 하니
진실로 까닭이 있음이라.
'춘야연도리원서'에서 이백의 탐미적 탄식과는 달리 촛불을 잡는 한희재의 밤잔치에는 좀 다른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당 제국이 망하고 천하에는 수많은 소국이 도처에서 아침에 섰다가 저녁에 사라지곤 하는 5대10국의 혼란이 전개된다. 남당은 남쪽에 세워진 혼란기의 마지막 소국이었다. 이미 북쪽에서는 송나라가 일어나 제국의 기틀을 닦고 있을 무렵이다. 예술 애호가로 유명한 남당의 마지막 왕 이욱은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선대의 중신을 지낸 한희재를 다시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운을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다섯 장면으로 구성한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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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희재야연도' 가운데 넷째 장면에 나오는 한희재 초상. |
이 소식을 듣자 한희재는 방탕한 밤잔치를 열기 시작한다. 왕은 한희재의 행태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화원의 화가인 고굉중(顧閎中, 생몰연대 미상)을 시켜 한희재의 밤잔치를 몰래 염탐하고 그려오게 한다. 그리하여 그려진 희대의 명작이 긴 두루마리(335㎝)의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이다. 여기에는 이욱의 관음증도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고굉중은 그 황음의 향연을 시간 흐름에 따라 다섯 장면으로 재구성하였다. 보고서(그림)는 매우 사실적이면서 고도로 암시적이다. 각 장면은 병풍에 의해 교묘하게 분절되면서 이어진다. 첫 장면에 들어가기 전, 제일 오른쪽에 살짝 드러난 침대의 어질러진 붉은 이불과 비파의 어수선함은 이 연희의 향락과 음란을 암시한다.
첫 장면에서는 향연에 초대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실이 춤추는 듯한 유사묘(游絲描)와 강한 철선묘(鐵線描)의 생동하는 묘사로 정체를 드러낸다. 그들은 모두 왼쪽 병풍 앞에 앉아 비파를 연주하는 여인을 향해 있다. 그 여인은 교방부사 이가명의 여동생이며, 그 앞에 비스듬히 앉아 연주자를 보고 있는 사람은 이가명이다. 이가명의 바로 옆에 작은 체구의 하늘색 옷을 입은 여자는 둘째 장면에서 춤을 추게 될 무희 왕옥산이다. 그리고 오른쪽 평상에 앉아 높은 사모를 쓰고 흑포를 입은 자가 이 밤의 주인공 한희재이다. 그 뒤에 홍포를 입고 있는 자는 그의 친구 장원랑찬(수염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 환관인 듯하다)이다.
■한희재를 더 크게 묘사한 이유는
등장인물의 표정과 시선, 미세한 움직임 속에 비파의 한 줄기 선율이 흘러다닌다. 그 선율은 홍포 사내의 상체를 급격히 앞으로 기울게 하고 사람들의 몸을 돌리게 하여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가명 뒤 젊은 사내와 오른쪽 한 인물이 예외적으로 다른 방향을 본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선율에 가장 매혹된 자들이 아닐까. 그 둘만이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있다. 아마 그들의 가슴을 에는 애절한 선율인가 보다.
예외적인 시선은 따로 있다. 병풍 뒤에서 고개를 내민 시녀의 시선이다. 그녀는 한 대상이 아니라 상황 전체를 측량하며 엿보고 있다. 그녀는 엿보는 시선의 은유이며, 화가 고굉중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이욱의 관음증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녀의 탐욕스런 시선도 이 방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공간을 넘어서는 시선이 이곳에 숨겨져 있다. 화가는 보고서 같은 사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이 숨겨진 시선의 암시를 미묘하게 포착한다. 그 시선은 한희재의 시선이다.
한희재는 다른 사람보다 크고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늘어뜨린 손은 움켜쥘 어떤 집착에서도 벗어나 버렸으며, 시선은 대상을 스치며 지나 그 너머 허공 어딘가를, 병풍 속 아득한 산수 어디쯤을 떠돈다. 우울하고도 비밀스러운 시선이다. 그는 연회의 중심이면서 가장 텅 비어 있다. 그의 정신은 어디론가 은둔해 버렸다. 고굉중은 그 텅 빈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둘째 장면은 더욱 극적이면서 모호하다. 빈 공간 속에 무희 왕옥산이 무릎과 팔과 허리를 굽혀 탄력을 축적하면서 곧 이어질 뿌림, 혹은 도약을 예비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짝 뒤돌아보고 있다. 이 순간, 한희재는 흑포를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막 북채로 북을 두드리려 한다. 이 순간, 젊은 사내는 박(拍)을 막 치려 하고, 사람들은 손뼉을 치기 직전이다. 이 순간은 움직임과 멈춤이 하나로 응축되고, 소리와 침묵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화가는 시선을 분산시키는 가구, 장식 등을 생략함으로써 춤과 북이 만들어낼 순간의 긴장감에 서사를 집중시키고 있다.
■사실주의 그리고 그 너머
그러나 이 응축의 순간에서 한 걸음 비껴나 공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인물들이 있다. 홍포의 사내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한 팔을 등받이에 걸쳤는데, 그 이완되고 거만한 모습이 매우 리얼하다. 그러나 향연을 탐닉하고 있는 홍포는 붉은 북과 겹치면서 강렬하고 자극적인 향략의 밀도를 만들어낸다.
또 한 명 사내는 수수께끼 같다. 박을 치려는 사내 뒤 늙은 중을 보라. 그는 이 향락의 장면을 외면하고 있다. 윤곽선이 다른 인물보다 선명하지 못해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정말 유령인지 모른다. 그는 그림 전체에서 단 한 번 이 장면에서 출현했다 사라진다. 한희재와 친분이 깊었던 덕명화상으로 추정되지만, 묘한 것은 여기서 유일하게 한희재와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진 점이다. 그 화상은 실체이기보다는 어쩌면 한희재의 숨은 마음의 투영이 아닐까? 그것은 그림 속에 한희재의 정체를 숨겨놓은 고굉중의 수수께끼일지 모른다. 그 수수께끼를 왕 이욱은 간파했을까?
향락의 밤 한가운데서 한희재의 손은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고자 북채를 들고 있지만, 그의 우울한 눈은 저 먼 곳을 향해 망명하고 있다. 백거이는 한 시에서 "대은(大隱; 고수의 은자)은 궁정에 숨고/ 소은(小隱; 하수의 은자)은 산야에 숨는다" 하였다. 한희재는 과연 대은이었을까?
그림은 이어서 휴식의 장면, 여러 명의 기녀가 퉁소와 피리를 연주하는 장면, 마지막 송별의 장면으로 전개된다.
고굉중은 귀족들의 은밀한 방 안을 폭로한다. 그 속의 향락적 삶과 문화를 유려한 선과 색채를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고 있다. 그 사실주의는 이어지는 송 왕조에서 활짝 꽃필 것이다. 그러나 진정 고굉중의 탁월한 점은 사실의 형태 너머로 떠도는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암시적으로 포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