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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 페르낭 크노프(1858~1921)의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1891). 그림의 모델은 친누이 마그리트이다. |
- 창백한 모습의 고뇌하는 여인
- 19세기 가부장제 산업화가 빚은
- '사회와의 단절' 시대상 투영
- 男 지배심화 속에 女 자각 확산
- 그 충돌이 시대적 히스테리로
- 그림 모델은 친누이 마그리트
- 일각선 그녈 사랑했다는 주장도
도대체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신으로 스며드는 음산하고 우울한 향기.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있다. 무언가 실체도 없는 심연의 무게가 그녀의 머리를 자꾸만 왼쪽으로 기울게 하고 있는 듯하다. 흰자위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라. 초점을 잃은 눈은 외부의 대상을 보는 시선이 아니다. 창백한 내면으로 침몰하는 차가운 응시다.
저 침몰하는 응시가 닿을 심연에는 어떤 풍경이 있을까?
고립된 낡은 내부와 한쪽 창으로 보이는, 버려진 도시의 적막한 거리(그림일지도 모른다), 머리에 푸른 날개를 단 조각상, 마치 한순간에 통째로 시들어버린 듯한 꽃들. 19세기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 페르낭 크노프(1858∼1921)의 기이한 그림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 속에, 한 여인의 응시 속에 이제 우리도 막 가둬지고 있다. 문은 잠겼다.
■여성 시인 로제티의 시에서 영감
문학과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이 선병질적인 화가는 부유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기대에 맞추어 법학과에 입학하지만, 곧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1년 만에 그만두고 만다. 그리고 브뤼셀왕립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화가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영국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몽환적이고 우울한 자신만의 상징을 만들어낸다. 상징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산업화의 물질적 욕망과 중세부터 이어져오는 종교 신비주의의 영적 욕망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파편이다. 그러나 이 두 욕망 모두 가부장제의 토대 위에 있음을 또한 환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1891)는 크노프가 만들어낸 우울한 상징들의 컬렉션일 것이다. 그는 여자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에서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다른 모든 것들은 내 자신 밖에 있네.
나는 문을 잠그고 그것들 내쫓지.
소란, 지겨움은 나다니네.
나는 내 자신의 문을 닫았네.
크노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다.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뿐". 그의 염세적 성향의 나르시시즘이 로제티 시를 통해 이 몽환적이고 음울한 장면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러나 고뇌하는 여인과 그 뒤의 기괴한 두상의 돌연한 만남은 화가의 의도나 내면을 넘어선 시대의 내면 풍경으로 자꾸 우리를 부른다. 여인의 황량한 응시는 그곳에 닿는다. 여인을 둘러싼 창백하고 스산한 풍경은 어쩌면 19세기 말 서구사회 속에 던져진 여성의 내면 풍경을 대변하는 것인지 모른다. 19세기 말은 산업화와 제국주의가 정점에 이른 시기다. 한 미술사가는 그 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살롱전에 이례적으로 여성 누드화와 그리스 신화의 핵심 모티프 중 하나인 남신(남성)에 의한 여성 납치 그림이 해마다 대거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산업화와 제국주의에 의한 타자 지배가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지배와 동일한 욕망코드로 작동함을 은밀히 보여준다. 실로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 억압이 제국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극단화하고 있었다. 확산되는 여성의 자각과 더욱 강고해지는 사회의 억압구조가 충돌하며 빚어낸 19세기 질병이 '히스테리'이다. 히스테리는 한 마디로 19세기 유럽 여성의 황폐한 내면 풍경의 은유다. 나를 가두는 내면 풍경인 것이다.
■푸른 색조로 출렁이는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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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텔화 '잠든 메두사'(1896). |
화면은 주황색과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시든 백합꽃이 뿜어내는 듯한 칙칙한 주황색은 짓밟힌 순결, 억압되고 좌절된 현실의 빛깔이다. 푸른색은 녹슨 주황색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데, 화면은 미구에 푸른색으로 온통 물들어갈 것만 같다. 화면 하단 전체를 가로지르는 긴 테이블에는 검푸른 식탁보 같은 것이 깔려 있다. 그것은 마치 심연의 바다처럼 출렁이며 그녀를 한순간에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푸른색은 내면의 심연으로 침잠하는 색이다. 그녀의 뒤에는 한쪽 날개를 통해 푸른빛을 퍼뜨리고 있는 잠의 신 히프노스 조각상이 있다. 잠의 신은 꿈과 몽상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친 영혼의 해방자이기도 하다. 그 옆에 있는 꽃 역시 우리를 몽환으로 이끌 마력을 감춘 양귀비꽃이다.
그녀는 이제 막 잠으로 빠져들기 직전의 경계선에 있는 모양이다. 히프노스 날개의 푸른빛이 그녀의 상처와 고독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마음의 문을 잠근 그녀는 히프노스의 안내를 받아 그녀만의 푸른 심연으로 잠길 것이다. 그런데 히프노스의 얼굴을 잘 보라. 저 얼굴은 바로 고뇌하는 여인의 얼굴과 무척 닮았지 않는가. 히프노스는 그녀 내면의 심연인 것이다. 그 심연의 끝은 어딘가? 수년 뒤 크노프가 그린 파스텔화 '잠든 메두사'(1896)는 히프노스의 심연에 다다른 여성성(메두사는 왜곡되고 억압된 여성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김현승 '가을의 기도') 그러나 고독 속에 잠든 메두사는 언젠가 깨어나 내면으로 접었던 날개를 펴며 어두운 하늘 저 너머로 날아오를 것이다.
19세기 여성의 히스테리를 치료하고자 프랑스의 샤르코는 최면술을 처음 사용한다. 최면술을 뜻하는 'hypnotism'은 히프노스(Hypnos)의 이름에서 나왔다. 히스테리 치료를 위해 프로이트는 샤르코에게 최면술을 배운다. 최면술은 숨겨진 의식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었다. 다만, 합리주의자 프로이트는 최면술의 신비주의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독자적으로 자유연상법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마음속 미증유의 거대한 심연과 직면한다. 여성의 히스테리, 잔혹한 고뇌를 통해 인류는 비로소 마음의 심층을 발견한 것이다.
■그림 모델은 친누이 마그리트
이 음울한 그림은 우리를 저 두렵고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심층으로 데려갈 작정인가? 그러나 어쩌면 이 푸른 몰락을 통하여 우리는 가부장제가 구축한 지배의 질서와 억압의 질곡을 넘어 혼곤한 잠과도 같은 무정형의 유동체, 폭력적인 분리의 철조망을 쉼 없이 가로지르며 생성하는 생명의 근원을 엿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성적 지배체계 질서를 전복하는 신화와 혼돈의 상상력이다.
먼 곳을 향하는 히프노스의 시선은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그림의 모델은 크노프의 친누이 마그리트이다. 크노프는 누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 때문에 미술사가들은 크노프가 누이를 사랑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크노프의 그림은 누이에 대한 억압된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 마그리트는 오히려 크노프 내면에 억압된 아니마(anima; 여성성)이며 문명의 질곡 속에 억압된 한 시대 여성성일 것이다.
질곡의 공간에 가두어졌지만 새로운 삶을 꿈꾸는 연약한, 그러나 끈질긴 몽상의 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