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세 번째 북한 방문을 마친 크리스토퍼 힐(오른쪽)이 일행과 함께 판문점을 통과하고 있다. 메디치미디어 제공

- 美 수석대표로 9·19 성명 주역
- 럼즈펠드 등 네오콘과 갈등 등
- 특정문구 수정도 흥미롭게 소개

'나는 (북한 영변의 원자로) 냉각탑이 폭파되는 장면을 일본 교토에서 지켜봤다. (…) 냉각탑 폭파 아이디어는 내가 김계관에게 처음 제시한 것이었다. (…) 냉각탑 폭파는 그해 6자회담의 마지막 성과가 됐다. (…) 몇 주 후인 11월 6자 회담은 한 번 더 열렸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의 행정부는 협상에 빠르게 나설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록 회의가 재개되지 않으면서…' (366~370쪽)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미국 외교의 최전선에서 저자인 힐은 이렇게 썼다. 힐은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아 2005년 9·19 공동 성명이 탄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9·19 공동 성명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핵확산금지조약),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조치에 복귀한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결국, 2008년 6월 27일 북핵 불능화 조치에 따라 북한 영변의 핵시설 냉각탑이 폭파되지만, 9·19 공동 성명 당시 순항할 줄 알았던 6자회담이라는 배는 곧 거센 파도를 잇달아 맞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책에는 주한 미 대사에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로 자리를 옮긴 힐이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6자 회담을 둘러싸고 진행한 외교협상의 전모가 최초로 공개돼 있다.

9·19 공동 성명을 내기 위해 중국, 북한을 설득하는 과정,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북한 당국을 위해 돈세탁을 한 혐의로 BDA에 대한 미 재무부의 제재 발표)를 풀려고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협상하는 과정, 한국과 공조해 6자 회담 합의 사항을 밀어붙이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다뤘다. '미국이 비판자들을 박살내야 한다'고 여기는 당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체니 부통령 등 네오콘과의 갈등도 회고록에 담았다.

9·19 공동 성명 발표 직전 특정 문구를 수정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두 번째 문장에서 북한과 미국의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이란 표현을 '냉전시대의 낡은 용어'라며 '평화롭게 함께 존재한다(exist peacefully together)'로 바꾸는 것.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전화를 받은 힐이 '휴대전화를 끄면서 이제 더는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한 뒤' 6자 회담 주최국인 중국 측에 설명하는 대목은 웃음을 자아낸다.

힐은 탁월한 스토리텔러다. 그는 풍부한 사례를 끌어다 쓰고 인물과 심리를 묘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는 북핵 문제에 대한 시각을 에둘러 밝히기도 했다. 공동 성명에 합의한 날 유나이티드항공 비행기 편으로 귀가하던 힐. 그에게 미국인 여승무원이 묻는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는 핵무기를 가졌는데, 왜 북한에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