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군에 해방될 당시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 국제신문DB

아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여전히 '깡통 반지'를 끼고 있다. 반지에는 'Arno 13.6.1942'가 새겨져 있다.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1942년 6월 13일 아르노가 건넨 반지다. 보잘것없는 모양이지만 놀랍게도 약혼반지다. 유대인인 그녀의 이름은 즈덴카 판틀로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뒤 자신의 생존기를 써내려간 깡통 반지의 저자다.

즈덴카는 192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여느 유대인 가정처럼 평화롭고 소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 살 소녀 시절이던 1939년 3월 15일 이전까지는 그랬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그녀와 가족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홀로코스트였다. 즈덴카는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는 과정에서 참상을 겪었다. '나치가 저지른 잔혹 행위의 목격자인 유대인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빠른 속도로 서진 중인) 소련의 손에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병들고 지쳐 대열에서 이탈하면 죄다 총살하는 '죽음의 행군'이었다.

헤어져야 했던 연인 아르노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재회. 테레진 강제수용소에서 다시 만난 아르노는 즈덴카의 손가락에 깡통 반지를 끼워준다. "이건 우리 약혼반지야. 널 지켜줄 거야"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아르노는 가축 운반용 화차에 실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갔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반지는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위대한 결단력과 용기를 발휘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됐다. 결국, '살아 있는데도 죽었고, 죽었는데도 살아 있었던' 참혹한 세월을 견뎌냈고 한 영국군 장교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홀로코스트 기간 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전쟁이 끝난 뒤 치료 차 스웨덴으로 건너간 즈덴카는 스웨덴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에서 비서로 일했지만 체코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바람에 한동안 고향에 갈 수 없었다. 그녀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마을을 찾게 된다. 거기서 옛 학교 친구들의 질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 책을 쓰기로 했다. "아직 살아 있는 우리의 수는 많지 않다. 우리의 마지막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힐 때 우리의 경험들도 전부 무덤에 묻힐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홀로코스트를 겪고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쓰였다. 다른 홀로코스트 생존자 회고록과 비교할 때 남다른 데가 있다. 참혹한 경험을 소박하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감상적이지도, 과장되지도 않다.

레노스 K 파파도파우러스(영국 에식스대학교 교수·망명자와 난민을 위한 트라우마센터 소장) 박사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녀(즈덴카)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자 사용된 밑그림이 아니라 수년에 걸친 자기진단을 통해 벼린 원숙한 숙고의 자산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