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호'(1839)

- 한 손으론 절망에 젖은 남편 손 꼭잡고
- 또 한 손으론 잠든 아이 손을 잡은 아내
- 험난한 현실 이겨내리라 굳은 각오 대변
- 19세기 영국 산업화 시대 급성장의 이면
- 이민자 신세된 노동자의 끈질긴 삶 포착

뿌리 뽑힌 자들은 떠나야 한다. 떠나는 사람의 등 뒤에는 늘 바람이 분다.

거친 바람이 그들의 지친 육신과 아픈 추억을 찢긴 깃발처럼 날리게 할 때, 그러나 그 스산함 속에서도 삶은 마주 잡은 두 손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1821~1893)의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1855)은 이 끈질긴 삶의 한 장면을 처연하고도 아름답게 포착한다.

이 그림의 역사적 현장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19세기 초, 영국의 위대한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 한 점을 먼저 만나야 할 듯하다.

터너가 그린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호'(1839)는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한 시대의 전환을 장엄하게 보여준다. 화면은 터너 특유의 유동하는 대기와 그 광활한 대기 속에 스며드는 미세한 빛깔들의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장엄한 낙조! 거대한 범선의 전함 테메레르 호가 작은 증기선에 예인되고 있다.

■터너의 '테메레르 호'를 떠올리는 이유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타원형 패널에 유채, 82.5×75㎝, 버밍엄 미술관 소장).

전함 테메레르 호는 영국이 대서양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이다. 테메레르 호는 제국의 바다를 열었지만, 그 시대의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진정한 대서양 시대는 산업화 시대이며 그것을 이끄는 것은 증기기관이었던 것이다. 과거가 된 범선 테메레르 호는 1838년 해체되기 위해 새로운 시대의 증기선에 끌려가고 있다. 증기선의 검은 굴뚝과 시커먼 연기는 앞으로 유럽 전체를 뒤덮을 산업화의 연기를 강렬하게, 그러나 불길하게 예시한다. 터너는 석양빛을 받는 최후의 테메레르 호를 창백한 황금빛으로 장식한다. 마지막 빛을 발하는 최후의 발광체처럼. 그것은 터너가 바치는, 저무는 한 시대에 대한 만가(挽歌)이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16년 후, 그 새로운 시대에 영국 화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은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그린다. 이제 대영제국의 그 대서양 바다에 또 다른 음울한 예감이 어른거린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전통과 근대, 산업화의 모순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시대였다. 급격한 산업화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과 극심한 빈부 격차의 우울한 신음이 검은 연기처럼 짙게 깔려 있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로 하여금 12세 어린 나이에 하루 10시간 이상 공장 노동을 체험하게 하였던 곳, 블레이크의 시 '굴뚝 청소부'처럼, 온통 검댕인 어린 굴뚝 청소부가 골목을 떠돌던 곳이 바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다.



아버지는 나를 팔았죠, 아직 나의 혀가

'청소! 청소! 청소!'를 제대로 외치지도 못할 때.

굴뚝청소를 하며 검댕 속에서 잠이 들지요.



매독스는 동료 화가 헤이던이 가난을 못 이겨 자살하고, 조각가 울너가 참담한 빈곤과 좌절감 속에서 신대륙으로 이민 간 사건에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그 자신 역시 "가장 비참하고 어려웠으며 미칠 것 같은 시절"이었다고 훗날 술회하고 있다. 이 뿌리 뽑힌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은 프랑스 칼레에서 태어났다. 그는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24세 때 도버해협을 건너 빅토리아의 영국에 정주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떠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는 라파엘전파의 언저리에 있었지만, 그의 회화적 특징은 근대의 삶과 사회적 문제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 있다.

■'장인의 노동'으로 그려낸 그림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그린 매독스 브라운의 초상화.

타원형 패널 속에는 한 부부가 영국을 출발해 신대륙으로 가는 배의 갑판에 앉아 있다. 그들의 등 뒤로 어지러운 군상과 백색 암벽으로 상징되는 도버해협의 험난한 물결이 보인다. 화가는 한 시대의 어두운 그늘을 라파엘전파 특유의 명확한 윤곽선과 선명한 색채를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산에 맺히는 물방울과 번지는 빛, 갑판 밧줄에 매달린 양배추, 추위에 상기된 피부색, 남자의 낡은 외투, 비와 바닷바람에 젖어 뻣뻣해진 가죽 치마의 질감은 거의 촉감적일 정도다. 그리고 아내의 숄은 마치 한 올 한 올 직접 짜듯이 그렸다. 울너 부부(실제 그림의 모델은 화가 자신과 그의 아내다)는 파산해버린 산업시대의 노동(예술)을 의미한다. 파산한 노동을 화가는 장인의 노동으로 3년에 걸쳐 치밀하게 그렸다. 씁쓸한 노동의 아이러니다.

남편의 얼굴에는 스산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래로 깔리는 그의 시선은 남겨두고 떠나는 과거를 보고 있다. 그는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회상에 잠긴 것이다. 반면 아내의 얼굴에는 우산이 가리지 못한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한 줄기 빛이 닿고 있다. 빛을 받는 시선은 먼 곳을 향한다. 뿌리 뽑혀 쫓겨가고 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새로운 땅에 대한 동경과 소망을 소중하게 품고 있다. 우산 뒤 흰색 구명정에는 '엘도라도'라고 적혀 있다. 엘도라도는 전설 속 잃어버린 황금 도시다. 이는 신대륙이 파산한 삶의 구명정임을 말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환상일 뿐임을 말하는 것인가?

남편 뒤로는 많은 손이 보인다. 손들은 이 그림 속의 가장 구체적인 표정이며 상징이다. 좌절과 욕망과 분노를 표현하며 갈망하고 움켜쥐는 저 안타까운 손들을 보라. 부부의 손에도 미묘한 표정과 상징이 담긴다. 남편은 한 손을 드러내고 한 손은 외투 속에 감추었다. 감춰진 손은 이전에는 가족의 행복을 보장했을 노동의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은 그저 우산을 쥐고 가족을 비바람으로부터 겨우 막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바람은 우산을 넘어 아내의 스카프를 사납게 날리며 아내의 얼굴에 몰려 있다. 감춰진 손은 거세된 남성을 보여준다. 그의 드러난 손 역시 활동성을 상실하고 아내의 손에 얌전하게 잡혀 있다.

■그녀의 둥근 모자는 후광처럼

아내는 손은 더욱 미묘하다. 한 손으로는 절망에 싸여 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있다. 그 손은 외부의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장갑을 끼고 있다. 맨 손인 다른 한 손은 가슴 부근 숄이 살짝 벌어진 부분에 있다. (숄의 살짝 벌어진 부분은 여성적인 내밀함의 장소이며 에로틱하면서도 성스럽다) 여기에서 아내의 한 손은 자궁 같은 숄 안에서 잠든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밖으로는 남편 손을 잡고, 안으로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아내의 두 손이 뿌리 뽑힌 가족의 연대를 유지한다. 장갑을 낀 밖의 손이 비바람과 세상의 험난함을 이겨내려 한다면 숄 안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손은 신세계라는 미래를 꿈꾸는 손이다.

혹시 그녀의 둥근 모자가 후광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실제로 인물상들을 타원형 패널 속에 그리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마리아와 예수의 성가족을 그리는 데 주로 사용된 형식이다.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의 마리아인가?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그 찢겨진 현실을 견디면서 미래의 빛을 향하여 삶을 잇고 있는 아내는 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