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량 끝에서 허공에 걸린 시를 읽고 있는 듯한 선비, 그 자신이 풍경이 되었다. 명나라 화가 심주의 '장려원조도'이다.

- 명나라 '오파' 심주의 말년 작품
- 인물의 등 뒤로 근경 펼쳐지고
- 먼 곳 향한 시선이 독특한 구도

- '세속의 경계' 의미하는 벼랑 끝
- 그 앞 공간은 좁지만 심오해

- 거칠고 무심한 붓칠 속 선비는
- 마치 허공 위 詩 읽는 듯하구나

처음 그 짧은 순간, 아마 당신의 시선은 살짝 당황했을 것이다.

첫 시선이 닿는 풍경 속의 사람이 이렇게 화면 상단에 있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더구나 풍경의 대부분이 사람 등 뒤에 있다니. 그리하여 당신의 시선은 화면 왼쪽 정점에 있는, 소요하는 이의 등 뒤에서 오른쪽 아래로 역주행하게 될 것이다. 명대 오파(吳派)의 영수 심주(沈周, 1427∼1509)가 말년에 그린 산수책의 한 장면 '장려원조도(杖黎遠眺圖)'이다. 자주 그는 그렇게 그렸다. 근경이 사람 등 뒤로 펼쳐지는 구도를 말이다.

원대의 저 고독하고도 위대한 예술정신이었던 예찬과 왕몽이 떠돌던 곳, 강소성 오현(지금의 소주)에서 심주는 태어났다. 예찬과 왕몽의 예술혼은 그곳에서 심주를 만나 뒷날 오파라 부르는 문인화(남종화)의 도도한 흐름을 이루게 된다.

심주의 집안은 대대로 사대부였다. 그런데 조부 심징은 좀 독특한 인물이었나 보다. 그는 후손에게 관직에 나가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한다. 신동이라 불렸던 손자 심주는 그 유훈을 지켰고 그리하여 그는 피 말리는 과거(科擧)와 관직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가 좋아한 시와 그림에 모든 재능과 힘을 쏟았다. 심징의 기이한 유훈은 중국 회화사의 행운이었다.

■황공망과 예찬의 풍격 승계

섬세하고 세밀한 그림을 그리던 젊은 시절 심주의 작품 '여산고도'.

심주는 동원, 거연, 미불 그리고 원대의 4대가인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의 그림을 두루 연구하고 그들의 필법을 습득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왕몽을 추종했던 젊은 시절 그의 붓은 공교롭고 세밀하였다. 스승 진관의 생일선물로 그린 '여산고도(廬山高圖)'가 그러하다. 이 섬세하고도 장려한 풍경에는 왕몽의 향기가 물씬 난다.

50세를 넘기면서 모든 고법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자신만의 경지를 이루게 되자 심주의 붓은 오히려 거칠어지고 평이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은 시절의 심주를 '섬세한 심주'[細沈], 그 이후를 '거친 심주'[粗沈]라 이르곤 한다.

'장려원조도', 등 뒤로 역주행하는 시선 속에 드러나는 풍경을 그려내는 붓의 흐름은 화려한 수사의 욕구를 버린 듯 무심하여 거칠면서도 간이하다. '거친 심주'이다. 기교나 명성에 얽매이는 속기(俗氣)가 사라져 버렸다. 무심한 평담함 속에 자유롭고 맑은 정신의 기운인 청량한 일기(逸氣)가 떠돈다. 황공망과 예찬의 풍격을 계승한 것이다. (실제 화단의 신화가 되고 있던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진품을 심주는 소장했다.)

'장려원조'는 지팡이를 짚고 먼 데를 조망한다는 뜻이다. '멀리 봄[遠]'은 산수화 시선의 기본원리이지만, 단순한 시선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산수화의 심원한 비의(秘義)가 담겨 있다. 산수화는 멀리 보는 풍경화다. 멀리 볼 때만이 산수의 거대한 기운(형세)과 그 기운과 이어진 우주의 생명력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의 생명력을 '대상(大象; 위대한 이미지)'이라 한다. 노자는 "위대한 이미지는 형체가 없다(大象無形)"고 하였다. '멀리 봄'은 형체를 넘어 기어코 저 아득한 '무형(無形)'에 닿으려 한다. 무는 텅 빈 것이 아니라 무궁한 우주적 생명력의 함축이다.

■여백, 미완성이면서 완성의 공간

'장려원조도'의 선비는 먼 데를 보고 있다. 먼 데를 보기 위해서는 벼랑에 이르러야 한다. 세속적 시선(가까운 데를 보는 시선)이 끊긴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길의 끝에서야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 당나라 왕유의 시 '종남별업'의 한 구절처럼.


거닐다 물길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는 장관을 바라본다.


운무에 떠 있는 벼랑이야말로 형상과 '형상 너머' 사이의 황홀한 경계 지대이다. 선비의 등 뒤(근경)가 형상의 풍경[有, 實]이라면 눈앞으로 열리는 여백은 형상 너머의 풍경[無, 虛]이다. 선비는 시선으로 풍경을 지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 풍경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풍경에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신이 풍경이 된다. "사람이/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정현종). '형상 너머'의 풍경을 관조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라 스스로 풍경으로 피어나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풍경과 더불어 저 아득한 무(無) 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다. 그리하여 선비 앞의 공간은 등 뒤의 공간보다 훨씬 좁지만, 훨씬 넓고 함축적이다. 비어 있지만 무궁하게 펼쳐질 공간이다.

선비의 시선이 닿는 왼쪽 공간은 이 그림에서 가장 미완성인 곳이면서 동시에 이 그림을 완성하는 곳이다. 화가는 왼쪽 공간에 먼 산을 담묵의 실루엣으로 슬쩍 드러냈을 뿐 붓을 대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 선비의 시선이 닿을 아득한 대기의 공간을 확보하고 선비의 시선이 형상을 넘어 무한으로 넘어갈 여지를 주었다. 그 여백의 공간에서 우리는 문득 시를 만난다. 선비는 마치 허공에 걸린 시를 읽는 중인 것 같지 않은가.


띠 같은 흰 구름 산허리를 에워싸고

바윗길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오솔길이 아득한데

홀로 지팡이에 의지해 먼 곳을 바라보며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응해 피리를 불고 싶어라.


그림은 소리를 가지지 못한다. 반면에 시는 본래 노래이며 소리다. '장려원조도'의 왼쪽 여백과 그 여백에 쓴 시는 그림에 문득 소리를 부여한다. 우리는 그것을 소리 내어 (혹은 눈으로 소리를 연상하며)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계곡물 소리, 돌길을 밟는 한적한 발자국 소리,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운무가 풍경을 적시는 소리가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함께 환기된다. 여운 같은 먼 곳의 피리소리, 나직이 읊조리는 시의 음송으로 풍경은 문득 리듬과 율동이 된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것이 시와 그림이 만나서 그윽한 시정(詩情), 심오한 사유를 생성하는 문인화의 품격이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나니.

■소박한 삶이 닿은 경지

심주의 생활은 소박하고 안정적이었으며 삶은 평온했다고 한다. '거친 심주'가 도달한 무심하고 평이한 붓과 같이. 그러나 이러한 심주의 삶과 예술을 좋은 가문에 태어나 행운으로 거저 얻은 산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는 인간의 욕망을 너무 과소평가한 생각이다. 심주가 얻은 소박한 평온과 평담(平淡)은 실상 가장 어려운 경계이다. 그것은 무한 팽창력을 가진 욕망과의 끊임없는 대결, 그 치열한 내적 절제와 수련을 통해서만이 이를 수 있는, 유학의 중용이나 노장의 허심(虛心)과 같은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속기를 떨치고 걸어올라 멀리 바라보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