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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독일 히틀러(오른쪽)와 프랑스 비시 정부 수반 페탱이 정상회담 전 악수하는 모습. 이 사진은 독일강점기 프랑스 대독협력의 상징이 됐다. 푸른역사 제공 |
광복 70년. 일제 식민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집권 여당 대표 집안의 친일 문제가 불거졌다. 이뿐만 아니다. 대통령 여동생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최근 10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암살'은 식민지와 친일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가 실패한 과거사 청산을 언급할 때 모범 사례로 꼭 등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프랑스다. 2차대전 당시 4년 동안 독일강점기를 거쳤던 프랑스는 파리 해방 이후 대독협력자를 처벌했다. 서류를 검토한 사람이 무려 35만 명, 이중 실제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9만8000명에 달한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과거사에서 완전히 해방됐을까.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는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독일강점기 전후의 프랑스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저자는 당시 재판 기록, 레지스탕스 지하신문, 팸플릿, 일간지, 주간지 등의 자료를 토대로 프랑스의 과거 청산 과정을 재구성했다.
먼저 '콜라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협력자'(collaborateur)의 약칭인 '콜라보'는 '독일강점기'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을 의미한다. 한때 영국 다음으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세계 최고 문화 강국이라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쳤던 프랑스가 점령당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자 수치였다. 그것도 모자라 독일에 항복한 뒤 프랑스 비시 정부의 국가수반 필리프 페탱은 연설을 통해 "오늘 나는 협력의 길에 들어선다"고 선언했다. 이후 콜라보는 역사적이자 정치적인 용어가 됐다. 우리에게 친일파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바로 '콜라보'다.
독일강점기에서 벗어난 프랑스는 당시 형법으로 대독협력자를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자 '국민부적격'이라는 새로운 죄를 만들어 과거사 청산에 매달렸다. 그 결과 엄청난 사람들이 재판을 받거나 약식 처형, 공개 삭발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완벽한 청산은 없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독일 측에 넘겨준 어두운 과거가 발목을 잡았고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점점 빛이 바래면서 프랑스도 과거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프랑스가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모범 답안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사 청산을 거의 하지 못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