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최고 원로 시인 유병근. 강덕철 선임기자 kangdc@kookje.co.kr

- "시인은 시로 나타나야"

"훌륭한 수필가이기도 한 김종희 대표가 운영하는 수영구의 문화공간 빈빈을 포함해서 두 군데에 일주일에 하루씩 나가 문학강의를 나갑니다. '활동'이라기보다는 여가 선용이지요. 문학 좋아하는 분들과 이야기 나누며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유병근 시인은 "내게는 '지하철'이 참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자리에 앉아 생각하기도 좋고, 떠오르는 시와 수필을 쓰기에도 참 좋아요. 농부도 땅을 일궈야 곡식이든 무엇이든 수확하잖아요. 나 또한 써야만 뭐든 나올 것이란 생각으로 쓰는 습관을 들였지요."

"얼마 전에는 우포늪에 갔어요. 가시연 있는 곳에 발을 담갔지요. 이 늪의 나이가 1억4000만 년이라 하더군요. 늪 밑바닥에는 그 1억4000만 년 역사가 깔려 있을 텐데 나는 그런 시간이 고름처럼 굳어 이무기의 이미지로 떠오르는 환상을 봤어요. 환상, 몽환, 어른어른 보이는 것 이런 게 참 중요하다고 다시 생각했어요."

시에 관한 유병근 시인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활달하고 형형했다. 1932년 경남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태생이니 올해 83세. 한국전쟁 직후 부산으로 와서 줄곧 시와 수필을 쓰며 그는 살았다. 1954년 '신작품'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공식 등단'은 1970년 '월간문학'으로 잡지만, 그의 시인 이력은 1954년 시작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고석규 조영서 손경하 하연승 등이 함께한 '신작품'은 비록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당시 문단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기성 문단과는 인식과 활동 방식을 조금 달리했기 때문이다.

유병근 시인이 '어깨에 쌓인 무게는 털지 않는다'(작가마을)라는 인상 깊은 제목의 새 시집으로 독자 곁에 다시 왔다. 그의 시는 팽팽하다. 그는 "내 시는 허무를 찾아간다. 허무 또는 허무의 밑바닥을 알아야 허무에서 탈피할 길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허무 속에서 안주하지 않는 형형한 눈빛 그리고 자신이 흔들리는 존재란 것을 알고 결국엔 끌어안는 것.



'흔들리는 물결이랑에 밧줄을 맨다 흔들리며 말하고 흔들리며 밥 먹고 흔들리는 수평선을 멀리 읽는다 어제 본 초승달과 어제 본 달맞이꽃은 어제 일이다 뱃등을 움켜쥔 뱃멀미, 긴가민가한 어제오늘, 긴가민가한 아네모네, 긴가민가한 가나다라, 긴가민가한 싱크 홀, 긴가민가한 신델리라, 흔들리며 읽은 동화 몇 줄이 흔들리곤 한다 빨랫줄에 몸을 말리는 바람은 흔들의자를 앞뒤로 흔들고 있다'('흔들의자' 전문)



흔들의자에 있는 시인은 흔들리는 존재다. 그러므로 흔들흔들 긴가민가의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시를, 긴가민가함 속에서 의미와 이미지를 건져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생선 머리를 식칼로 툭 내리친다 그의 등 뒤에서 나는 어리둥절하다 꼬리지느러미를 두어 번 파닥거리던 꼬리는 이윽고 편안하다 창밖의 바다가 지긋이 눈을 감는다…'('식칼' 부분) 날선 감각의 시어가 그의 나이를 잊게 한다.

심한 과잉을 겪고 있는 문단정치나 문학 바깥 일에는 관심을 둔 적 없는 그는 "시인은 시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나의 고집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