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웅장한 대관산수화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여기에서 완성되었다.

이성(李成, 919~967)의 경이로운 신품, '청만소사도(晴巒蕭寺圖)'를 보라. "허공의 푸른빛이 옷을 적신다"는 왕유의 시구처럼 아직 비의 푸른 비늘이 묻어 있을 듯한 청량한 늦가을의 대기, 골짜기가 피워내는 엷은 안개, 알 수 없는 어떤 무한의 내부처럼 열리는 이내[嵐] 속에 홀연히 솟는 장엄한 산봉우리와 우리는 직면한다. 비 갠 묏부리, '청만(晴巒)'이다. 그리고 그 아래 언덕의 소슬한 사원, '소사(蕭寺)'!

사원은 화제처럼 소슬하기보다는 차라리 자못 웅장해 보인다. 이 절집 풍경을 소슬하게 만드는 것은 해조묘(蟹爪描: 나뭇가지를 게의 발처럼 그리는 묘사법)로 그려진 주변 나무들이다. 허공을 움켜쥐려는 가지들에는 음울한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 귀기는 허공을 감전시킬 이상한 에너지로 충전된 듯하다. 황량한 생기, 헐벗은 충만, 이런 모순적 조어가 거친 숲을 떠돈다. 화면 중앙에 핵심 모티프를 배치하는 것은 화면을 단조롭게 만드는 것이라 대체로 피하는 것이지만, 화가는 작심한 듯 사원의 탑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이미지는 중앙의 탑으로 모여들고 다시 여기에서 이미지 너머를 꿈꾼다. 이 소슬한 언저리에 화가 이성의 마음이 머무는 것일까?

■불우했던 당 종실의 후예

이성은 당 종실의 후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나라가 망하고 5대와 10국이 난립하며 명멸하던 혼란의 시간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시대의 혼란은 나라를 경영하고자 했던 지식인의 꿈을 좌절시켰다. 그는 산동 영구(營丘)로 은거하였다.

'선화화보'에서는 이성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그 재능과 운명이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시와 술에 빠졌다. 또 그림에 흥을 맡겼는데 그림이 정묘하였다. 처음부터 팔려고 하지 않았고 오로지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송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성은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를 모방한 위작이 범람했다고 하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생의 수수께끼를 누가 알랴.

어떤 이들은 '청만소사도'가 제국의 이념을 표현하였다 한다. 화면 가운데 우뚝 솟은 주봉은 천자를, 주변의 작은 봉우리들은 신하들을 표상한다. 사물들은 저마다 확고한 질서와 견고한 구도 아래 배치되어 있다. 그리하여 장엄한 질서[理]의 우주관을 세우고자 했던 신유학자들의 신념을 이성은 그림으로 실현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과연 '청만소사도'는 제국의 이념을 실현한 것일까? 거창한 주장일수록 대체로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흐르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이미지의 운동을 따라가자. 그때 우리는 불우한 화가의 내밀한 꿈속을 여행하게 될지 모른다. 당나라 왕유의 시 '향적사를 지나며'는 우리의 여행을 인도하는 듯하다.



향적사는 어딘가?

몇 리를 들어가니 구름 산봉우리

고목 우거져 인적이 끊긴

깊은 산 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

개울물 소리 가파른 바위에 목메어 울고

햇빛은 푸른 솔잎에 차가운데

저물녘 빈 못 굽이

선정에 들어 망령된 마음 씻네.



늦가을이거나 초겨울쯤의 차가운 숲, 한림(寒林)의 정취 속에 귀를 기울여 보라. 먼 데 사람들 소리, 청량한 대기에 스며드는 찬 계곡물 소리, 마른 나뭇가지를 흔드는 처연한 바람 소리, 허공을 더욱 광활하게 하며 멀어지는 새 소리. 이 소리를 모두 품고 있는 것은 화면 하단의 풍경이다. 이 근경에 풍속화와 산수화와 계화(界畵: 자와 같은 도구를 사용해 건물을 정밀하게 그린 그림)가 혼숙하고 있다. 막 다리 앞에 도달한 나그네 일행과 다리 건너 사하촌 주점 풍경은 풍속화고, 언덕의 절집은 계화다. 그리고 그 풍속화와 계화가 산수화에 담겨 있다. 근경의 다양한 소란과 힘은 흐르고 흩어지고 뒤섞이면서 산사의 탑으로, 그 벼랑 같은 절정의 끝으로 모인다. 산사를 둘러싸고 귀기 어린 나뭇가지에서 충전되는 스산한 에너지도 이 한 점으로 모인다.

하단의 모든 소란과 움직임과 에너지가 모여드는 탑의 뾰족한 상륜부는 차라리 아득한 선정에 들어선 동안거같이 적요하다. 모든 길은 여기서 끊긴다. 산수화를 느끼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림 속의 길을 따라 거닐어 보는 것이다. 그러다 길이 끊길 때 우리는 시선을 거두든지, 아니면 길 아닌 길, 시선 너머의 시선으로 비약해야 한다. 길이 끝나는 자리, 이곳은 삶의 흔적과 구름의 흔적이 끊어지면서 만나는 자리이다. 구름의 머리 같은(운두준) 산, 구름이 말려 있는 것 같은(권운준) 산의 세계가 탑 위로 피어오른다. "담백한 먹은 꿈속 구름 같고, 바위는 구름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후대의 품평은 여기를 말함인가.

■49세 나이, 취한 채 길 떠나다

구름산의 장엄한 풍경은, 어쩌면 탑이 피워내는 몽상인지도 모르겠다. 탑의 상륜부는 마치 폭풍우 앞에 선 고요한 피뢰침처럼, 외계와 접신하는 안테나처럼, 화가 자신의 몽상의 촉수처럼 솟아 있다. 몽상의 촉수에 접속하며 뒤로 피어오르는 풍경은 완연히 수직의 상승력 속에 있다. "산은 솟는 힘"이라는 바슐라르의 말처럼 산은 솟아오르고 피어오른다. 나무들도 몸을 비틀지 않고 수직으로 세운다. 수직의 상승력을 더욱 극화시켜 주는 것은 하강하는 폭포다.



물줄기 날아올라 곧장 삼천 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이 아닐까?

(이백 '망여산폭포')



삼천 척을 떨어지는 폭포의 장쾌한 하강에는 은하 세계로의 아득한 비상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다. 쫓겨난 신선 이백의 소슬한 반어법이리라. 동아시아에서 비상의 몽상에는 흔히 선계에 대한 불가능한 꿈이 불길하게 배여 있다.

이성은 40세 전후, 한 후견인의 초대로 수도 개봉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가 후견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 생활을 짐작게 한다. "나는 본래 선비이므로 비록 마음이 그림 그리는 일에 노닌다 해도 그것은 그저 마음이 즐거워서이다. 왜 내가 대갓집에 분을 갈고 핥는 객으로 끌려들어 가 화사, 잡인과 동렬에 서야만 하는가?" 쥐뿔도 없으면서 이렇게 꼬장꼬장한 사람이 어떻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도읍지 생활을 견딜 수 있으랴. 결국, 그는 식구를 데리고 회양으로 이주하여 술과 삶을 바꾼다.

만취했을 때마다 그는 '청만소사도'의 탑에 오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길이 끊긴 자리, 예술의 저 천 길 절벽 같은 중심에서 그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마침내 4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회양의 황량한 거리에서 이성은 술에 취하여 생의 길을 끊고 만다. 역사가 그에게 내린 평가는 "고금의 제일인자이며 백세의 스승."('화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