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영구 남천동 남천성당에서 성탄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국제신문DB

- 김나현·이규정 등 문인 11명
- 종교 입문 순간 실감나게 기록

갓 나온 '부산가톨릭문학'(부산가톨릭문인협회 발행) 여름호(사진)가 '세례의 추억'이라는 기획특집을 선보였다.

세례의 추억은 세월과 상관없이 선명한 듯하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문인으로 활동하는 회원 11명이 보내온 글은 절실하고 순결한 마음을 담았다는 점에서 한결같다. 세례와 함께 하느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극적인 순간을 담아 어떤 면에서 웬만한 문학 작품 못지않게 문학의 향기가 짙다. 참여한 필자는 김나현 김석주 박송죽 배계선 오지영 이규정 정순남 조수선 최순덕 현애자 황소지 회원이다.

소설가 이규정 씨의 '세속적 욕망과 교만의 껍질을 깨고'는 오래 전 부자 간에 있었던 뜨겁고도 아팠던 '맞섬'의 순간을 담담히 회고한다. 온 가족이 성당에 나갔지만, 그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바빴고 성당은 살 만한 사람이 나가 호사 경쟁이나 하는 곳쯤으로 생각했다.

공부를 썩 잘하던 큰아들의 성적이 쭉쭉 떨어지기에 이유를 묻자 아들은 "아버지께서 성당에만 나가시면 성적 다시 올리겠습니다"고 한다. 명석한 아들이 좋은 대학 가서 판검사나 의사만 된다면 무엇이 문제랴 싶어 세례를 받고 '나일론 신자'가 된다. 하지만 큰아들은 약속과 달리 신학대학으로 가 버리고, 그는 표현할 길 없는 상실감에 시달리고 분노한다.

그러다 신부님의 권유를 받고 '속는 셈 치고' 우암동 사랑의 집에 들어가 3박 4일 중 2박 3일을 온통 울음 속에서 보내는 체험을 한다.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 품에 안긴 그는 현재 쉰이 넘은 수도사제로 잘살고 있는 아들을 위해 아내와 함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박송죽 시인은 세례의 추억을 '참으로 황홀한 기쁨으로 영혼이 눈뜨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 뒤 신앙생활은 가시밭길 위의 맨발이었다. 시집 식구들 눈치를 봐야 해 '선데이 신자'로 겨우 만족했다. 스승인 유치환 시인이 교장으로 계시던 경남여고에 찾아가 시집가게 됐다고 인사했을 때 대시인 유치환이 "박 군, 아깝다!"고 말했던 문재(文才)였다.

그는 언니와 형부가 타계하면서 남게 된 다섯 조카를 시집 식구들 몰래 건사해야 했다. 그런저런 어려움이 쌓여 그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영도다리에 두 아들을 업고 걸리며 갔다가 "둘째가 너무 울어" 자살마저 실패한다. 하지만 그 힘겹던 시절은 그에게 시(詩)를 돌려주었다. 큰아들은 하버드대 교수가 됐고, "너무 울던" 둘째는 수도사제가 됐다. 하느님 품 안에서 박 시인은 지금 그 시절을 담담히 떠올린다.

치명적인 삶의 실패 앞에서 세례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김석주 시인, 현애자 수필가의 글도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의 충만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추억도 꽤 있다. 정순남 시인은 "나와 주님의 만남은 사건이며 꿈 아닌 생시, 인격적 만남이었다"며 비밀을 수줍게 털어놓는다. 남편이 타계하고 퇴행성 관절염으로 아픔을 참지 못하던 어느 가을날 직접 내 앞에 나타나서 어루만져주신 성모님, 주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통곡하고 기뻐 웃고 춤까지 추던 체험. 그는 지금도 충만한 기도의 삶을 산다.

글쓴이마다 세례의 추억이 다채로워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믿는 이들이 만든 문학잡지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