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스티븐 로렌스(왼쪽)와 살인 용의자 2명이 마침내 유죄로 확정됐음을 크게 보도한 영국신문 '데일리 메일'의 2012년 1월 4일 자 1면. 이 신문은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1997년 2월 14일 자(오른쪽 사진 속 왼쪽 위 지면)부터 사법정의와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기사를 실었다. 출처 데일리 메일 홈페이지

- 1994년 흑인 고교생 스티븐 로렌스
- 인종혐오주의자들에 살해됐지만
- 부패한 사법당국 무혐의 처분

- '중대 범죄에 한해 일사부재리 예외'
- 이후 영국 사법개혁으로 새 원칙
- 2012년 용의자 둘 유죄평결 이끌어

-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파기환송
- 증거능력 문제삼은 법원 납득 안 돼

"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있었는데, 그의 밭 가운데에 그루터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토끼가 내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농부는 쟁기를 버려두고서 그 그루터기만 지키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다시는 토끼를 얻을 수 없었고, 그는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 옛날 왕들의 정치를 가지고 지금 세상의 백성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은 모두 저 농부처럼 하릴없이 그루터기를 지키는 것과 같다." ― 한비자 '오두'

■형사정의법, 영국이 보여준 변법

1994년 4월 22일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한 고등학생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소 근처를 걷고 있었다. 이때 한 무리의 백인 청년들이 다가왔고, 이들은 곧 이 고등학생을 에워싸고는 내리누르면서 칼로 깊숙이 두 차례 찔렀다. 고등학생의 오른쪽 쇄골과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른팔의 감각이 사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진 고등학생은 120m나 달려간 뒤 쓰러져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사망한 고등학생은 스티븐 로렌스(Stephen Lawrence)라는 흑인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주요 용의자들이 밝혀졌다. 게리 돕슨, 데이빗 노리스 외 세 명으로, 이들은 극단적인 인종혐오주의자였다. 그런데 2주가 지난 뒤에야 다섯 명의 용의자가 차례로 체포되었고, 7월 29일 검찰청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중지했다. 이 의심스러운 검찰청의 발표에 반발하여 로렌스의 가족은 검찰을 통하지 않고 자가(自家) 기소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어떠한 법률적 도움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법의학적 증거를 분석하고 목격자들과 다시 인터뷰하여 기소했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희생자는 있고 범죄자가 없는 사건! 당연히 의혹이 제기되고 여론도 들끓었다.

그리고 1999년에 하나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2년간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여 수사와 재판 과정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친 그 보고서는 '맥퍼슨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스티븐 로렌스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1997년 7월 31일 내무장관 지시로 윌리엄 맥퍼슨이 책임지고 조사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 네 가지다. 첫째는 늑장 수사, 둘째 경찰의 뇌물 수수, 셋째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수사기관, 넷째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인종차별제도 등이다.

'맥퍼슨 보고서'에 따라 새롭게 로렌스 살인 사건을 조사하여 재판해야 하지만, 문제는 "이미 무죄로 판결받은 사람에게 같은 죄를 다시 물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이는 최종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같은 죄를 두 번 묻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첨예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한쪽에서는 "원칙을 바꾸는 것은 수백 년 사법 체계를 뒤흔드는 것이다"라고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오랫동안 존재해 온 제도와 관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유지를 주장하는 쪽과 변혁을 주장하는 쪽의 대립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고, 변혁을 주장하는 쪽이 늘 불리하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은 오랜 관습에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이고, 변화는 불편하며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에서는 2년 동안의 조정을 거쳐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이른바 '형사정의법 2003(Criminal Justice Act 2003)'이다. 이 법은 "살인, 성폭행과 같은 중대한 범죄에 한해서 새로운 강력한 증거가 확보되면 범죄자를 다시 심판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일사부재리 원칙'을 적절한 수준에서 변혁한 것이다. 이 법을 토대로 스티븐 로렌스 사건은 다시 재판할 수 있었고, 새로 확보된 증거에 의해 유죄가 입증된 두 명의 범인은 2012년에 각각 15년 2개월, 14년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변혁은커녕 실행조차 뒷걸음인 한국

변법이라 해서 변혁만이 능사는 아니다. 설령 변혁을 했다고 하더라도 공명정대하고도 철저하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법치는 적절한 변혁과 더불어 공명정대한 실행이 어우러져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영국의 '형사정의법 2003'도 곧바로 실행되어 하마터면 법망을 빠져나갔을 중죄인들을 심판대에 세워서 그들의 범법에 걸맞은 처벌을 내렸다. 이것이 진정한 법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최근에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선개입 사건 상고심에서 일부 파일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아 사건을 파기환송한 일은 과연 한국이 법치의 기본을 잘 지키고 있는지, 법치국가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들게 만드는 사례다.

지난 16일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지시사항과 업무일지가 담긴 두 개의 파일을 "일부 내용이 조악하고 개인적인 부분이 포함돼 있다"고 하면서, 제출된 증거들의 증거능력이 부정된 상태에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유무죄 판단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사법부의 최고기관에서 내린 판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엉성하고 참으로 두루뭉술한, 결코 대법원에 걸맞지 않은 판결이다. 현 정권에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이거나 현 정권의 눈치를 본 것으로 해석되지만, 어떠한 이유나 명분을 덧붙여도 정당화되지 않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판결이다. 대법원의 이런 판결을 두고 '보수적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허튼소리거나 군소리다. 이미 원칙을 저버렸는데 거기 무슨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겠는가? 법은 그 자체로 원칙이다. 원칙을 저버리는 순간, 거기에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의 공백'이 있을 뿐이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 장석지(張釋之)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형옥(刑獄)을 관장하는 정위(廷尉)의 벼슬에 있었다. 어느 날, 한나라 고조인 유방(劉邦)을 모시던 사당에 도둑이 들어 옥가락지를 훔치는 일이 발생했다. 도둑은 곧 붙잡혔는데, 몹시 노한 문제는 도둑을 장석지에게 넘겨 다스리게 했다. 장석지는 종묘의 옷과 물건을 훔친 자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기시(棄市, 사형에 처한 뒤 시신을 시장 바닥에 버리는 형벌)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러자 문제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놈은 선제(先帝)의 종묘에서 물건을 훔쳤소. 내가 그를 정위에게 넘긴 까닭은 그놈의 집안까지 멸하도록 하려던 것이었소.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기시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이오?"

이에 장석지는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법에 따르면 이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형벌이란 경중을 가려 처리해야 합니다. 지금 종묘의 물건을 훔쳤다고 하여 훔친 자와 그 집안을 멸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어리석은 백성이 고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흙을 한 움큼이라도 훔쳐가는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떤 법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문제는 한참 생각하더니 장석지의 판결이 타당하다고 여겨 동의하였다.

■법을 밝혀야만 강해진다

한비는 법령이 느슨해지고 상벌을 함부로 내릴 경우에 그 나라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면서 '칙사(飾邪)'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趙)나라는 '국률(國律)'을 분명히 하고 대군을 거느리던 때에는 인구도 많고 병력도 강해서 제나라와 연나라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국률'이 느슨해지고 위정자들이 나약해지면서 나라의 영토가 날로 줄어들었다. 연나라는 '봉법(奉法)'을 분명히 하고 관아의 결정을 신중하게 할 때에는 동쪽으로 제나라까지 현을 두고 남쪽으로는 중산(中山) 땅을 다 차지했다. 그러나 '봉법'이 시행되지 않고 관아에서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되자 군주의 측근들이 서로 다투고 아래에서부터 논쟁이 일어나면서 병력은 약해지고 영토는 깎였으며 나라는 이웃한 적국에 제압당했다. 그래서 '법을 밝히는 자는 강하고, 법을 소홀히 한 자는 약하다'라고 말한다."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매주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