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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음료 박스는 '성완종 리스트' 수사 과정에서 한때 금품 전달 용도로 쓰인 것으로 전해져 유명세를 치렀다. 뇌물은 상황에 따라 변신을 거듭한다. 국제신문 DB |
- 기준 모호하지만 강한 파괴력
- 전쟁승패 국가운명 결정하기도
- 십자군전쟁부터 김영란법까지
- 흥미로운 사례로 인류사 비춰
'뇌물'이란 낱말을 우리는 주로 대중매체에서 만난다. 정치 뉴스에서 접할 때가 많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성완종 리스트'를 비롯해 숱한 정치인이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 또는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국민에게서 지탄받고, 정치 생명에 치명상을 입었다.
이런 현상은 뇌물이 주로 정치 영역에 국한된 시사 현상의 하나라고 여기게 한다. 그래서 많은 이가 뇌물을 때 되면 와서 한바탕 사회를 흔들어놓고 가는 행실 나쁜 손님 같은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역사학자 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박사가 쓴 뇌물의 역사가 펼쳐 보이는 뇌물의 세계는 이런 상식을 철저히 깬다. 이 책에서 뇌물은 인류의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하게 해주는 당당한 인문적 주제로 자리매김한다. 뇌물의 역사를 폭넓게 꼼꼼하게 살펴보면, 사회와 인간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책 집필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임용한 박사(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는 이름난 전쟁사 전문가이다. '전쟁과 역사 1~3권'(삼국·고려전기·고려후기)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등의 책을 쓴 그의 강연은 전쟁사의 특정한 장면만 떼어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흥분하는 식의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차분하고 치밀하며 폭넓게 전쟁사에 접근해 거기에서 실체가 있는 결론을 끌어내 왔다. 이런 역량은 '뇌물의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태곳적부터 탄생한 뇌물죄는 모든 범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뇌물죄는 거대 범죄이면서 소소한 일상의 범죄이기도 하다. 경계도 모호하다." 오늘날 한국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억~수십억 원을 받고도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멀쩡한 지배층이 있고, 엉겁결에 공무원에게 푼돈을 주려다 뇌물 공여로 잡힌 서민도 있다. 무엇이 뇌물이고, 무엇이 아닌가.
문제는 이렇듯 모호하고 강력한 뇌물이 국가나 사회의 운명을 결정해버릴 만큼 파괴력이 크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다. 뇌물은 한 사회의 역사를 해석하고 구조를 밝힐 단서를 가득 담은 인문적 주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16세기 조선에서 노비를 뇌물로 주고받는 비리가 성행했다. 양인은 나라에 세금과 부역을 제공해야 하지만, 노비는 이 의무가 면제된다. 양인 스스로 자신들이 도망 노비라고 위장 신고해서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는다. 고을 수령은 이들 위장 노비를 상급자인 정승에게 뇌물로 가도록 알선한다.
양인은 세금이 줄어 좋고, 고을 수령은 상급자인 정승에게 잘 보여서 좋고, 정승은 노비가 늘어서 좋은데 문제는 세금을 내지 않는 노비가 너무 많이 늘어나 국가 재정 수입이 건국 100년 만에 3분의 1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은 그렇게 임진왜란을 맞았고, 군대와 재정이 없어 멸망 직전까지 가야 했다. 이처럼 알듯 모를 듯 이어지는 뇌물과 부패 구조는 지극히 위험하다.
십자군 전쟁 때 전멸 위기에 처한 원정군이 대장 보에몽의 뇌물질 한 번에 안티오크를 점령한 이야기, 뇌물로 망한 명나라, 미국 금주법 시대의 뇌물 등 역사장면부터 부패 근절을 위한 김영란법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고 흥미로운 사례를 담았다. 어떤 면에서 뇌물은 인류사를 예리하게 비추는 신기한 거울 같다.